◇ 시인과 시(현대)

김태인 시인 / 반딧불(Firefly Light)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5. 12:58

김태인 시인 / 반딧불(Firefly Light)

 

주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저는 다만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어요

주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주에게로 다가와 반딧불이 되었어요

주님이 제 이름을 불러 주신 것처럼

주님의 생각과 마음에 알맞은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에게로 가서 저도 그의 반딧불이 되고 싶어요

우리들은 모두 무언가 되고 싶어요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되고 싶어요

 

 


 

 

김태인 시인 / 해변의 아침

 

 

몽산포로 놀러오세요

매월 보름 갯벌은 어김없이 열려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들고

체험을 팔기위해 삽과 맛소금을

끼워 팔기도 하지만 땅 밑 세상에는

덤으로 커다란 공포를 선물하죠

 

몽산포 갯벌로 오세요

맛은 없지만 손맛이 살아있는

맛조개를 캐고 싶거나

입맛은 없지만 살맛은 나는 새벽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짠내나는

삽질을 하고 싶다면요

 

바다가 열리고 갯벌이 드러나면

땅 밑은 집집마다 대문을 걸어 잠그죠

굴뚝에서 새어나오는 잔목소리들

ㅡ엄마, 사람들 발냄새가 나요

코를 꽉 막고 절대 숨 쉬어선 안 돼

 

슥-슥-삽질이 깊어졌다 얕아지며

동죽 껍질이 삽날에 부서지고

꽃게 옆구리가 찍혀 날아가고

짠내나는 발냄새에 숨이 턱 막혀서

결국 갯벌 위로 고개를 쏙 내밀고 말죠

 

땅 밑은 사연 없는 집이 없어요

텅 빈 마을도 있고 소라 껍질만 있고

ㅡ하루만 발냄새가 나도 다음날은 안 잡혀

몽산포 상점 여주인의 말처럼

사연은 늘 눈물을 동반하죠

 

사연 없는 밀물이 서서히 들어오고

지상에 즐거움이 한 걸음씩 밀려나면

갯벌 아래 드리운 공포가 지워지죠

엄마를 찾는 목소리들로

바닷물은 점점 짠맛을 더해가요

 

파도에 사랑이 지워져도

돌아오게 만드는 건 기억의 힘이고

집을 짓게 만드는 건 망각의 힘이죠

해변의 아침을 문전성시로 만드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뿌리는

맛소금의 힘이니까요

 


 

김태인 시인 / 길의 문신

 

 

흘러든다 신화를 아로새긴 문신들

 

잠든 눈꺼풀에 얇은 키스를 하고 차창을 흘러 길의 피부로 뛰어내린다

 

너는 잠자는 동안 딱딱한 외피를 벗어 아르테미스 신전의 꿈을 꿀 것이다

 

점멸의 거리 허리 굽은 불빛이 신화를 따라 길게 흐르고

고요한 밤은 하얀 달과 노란 별을 엮어 별자리 하나씩을 첨탑으로 높이 던져 올린다

 

말랑하고도 매혹적인 밤을 연신 뿜어내는 메두사의 입김, 대지는 딱딱한 어둠으로 굳어간다

 

돌처럼 경직된 어둠을 깨우고 북쪽 하늘에 뜬 별의 경로를 해독하며

밟아가는 구불구불한 강물의 몸속

 

철교 위로 떠오른 가로등 아래 오르페우스

교차로 철길 위에 선 위태로운 에우리디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지 말아달라는 애원으로 대륙의 끝에서 감도는 전운의, 안개는 흐른다

 

운명 같은 새벽이 오면 어김없이 엘리시움을 향해 걸어가는 길의 문신들

 

잘린 신화의 머리가 걸린 현수교 철탑 아래로 풀어지는 부드러운 어둠

어느 여신이 벗어 놓은 지상의 고운 허물처럼

 

*엘리시움: 행복한 자의 섬

 

-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 2018년 가을호

 

 


 

 

김태인 시인 / 11월의 허수아비

 

 

오소서, 오소서

상처뿐인 이 계절에 오소서

기다리다 흘리는 눈물이

차갑게, 차갑게 얼어붙어

날카로운 고드름 되어

그대 가슴 찌르기 전에

 

그리움에 지친 영혼

구름처럼 붉은 노을 되어

어딘지 모를 곳에 부서져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넘치는 사랑으로

누렇게, 누렇게 삭아 내리는

저 들녘의 얼빠진 바람둥이들

돌아보지 말고 빨리 달려와

 

모닥불 같은 사랑으로

굳어진 혈관을 달구어

녹슬어 멈춰 버린 심장에

뜨거운 피를 부어 주오

 

그대여, 그대여,

꿈속에서 서성이는

신기루 같은 그대여

 

 


 

 

김태인 시인 / 아들의 시선

 

 

잠든 아들의 안경을 써 보았다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은 방은

벽과 창문이 구부러지고 책장이 휘어지는 공간

 

세상을 똑바로 보기 위해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가까운 건 안경을 써야 보여

 

아들이 돋보기를 쓴 건 네 살 무렵이었다

늘 미안한 마음속에 살았다

 

대학가면 안경 벗게 해줄게

어쩌면 비행기 조종도 할 수 있을 거야

 

불을 끄고 나오는 등 뒤로

아들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김태인 시인 / 갈라파고스*

 

 

 어둠이 입술에 닿자 몸 안의 단어들이 수척해졌다 야윈 몸을 안고 섬 밖을 나갔다가 새벽이 오면 회귀하는 조류(潮流), 금이 간 말에서 아픈 단어가 태어나고 다 자란 말은 눈가 주름을 열고 떠나갔다

 

 남겨진 말의 귀를 열면 치어들이 지느러미를 털며 들이 닥쳤다. 은어(隱譜)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욕설이 귀를 깨문 몸 안에 손을 넣어 상한 심경을 꺼내 놓자 말수 줄은 언어의 생식기는 퇴화되어 갔다

 

 파도를 멀리 밀어낸 밤은 등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레를 떼어낸 언어는 외딴섬에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발굽에 물갈퀴가 생기고 단어에 부리가 자랐다 비늘이 깃털로 변해 조류(鳥類)로 진화지만 텅 빈 죽지에 감춘 내재율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야윈 말들이 하나 둘 돌아온 섬은 언어의 기원에 종말을 고하고, 밤은 더 이상 섬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동쪽으로 흘러든 난류는 바다거북 등껍질에서 불가사의한 문자를 캐고 암염처럼 굳어버린 죽은 언어를 떼내었다

 

 남쪽 염전에서는 느린 운율과 음가들이 뿔 고동의 귓가에서 보송보송 말라갔다 새벽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되살아난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갈라파고스: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섬 혹은 제도.

 

 


 

김태인 시인

1974년 전북 남원 출생. 동국대 일반대학원 졸업. 2013년 5.18 문학상, 2015년 《시산맥》 등단, 201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은상수상.(2015). 현재 강원대학교 국제무역학과 교수. 시집 <누군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