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수 시인 / 꽃은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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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 시인 / 꽃은
과묵한 유서이다 잘 죽기 위해 마지막 길 스스로 향을 뿜는다 초라하게 피우는 꽃들이나 화려하게 피우는 꽃들이나 다 다음 봄날 부활의 꿈을 아니면 겨울 영면을 뿌리마다 새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는가 자기 삶을 내려놓는 지나온 날들에 대해 나름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것인데 살기 위해 피워내는 꽃은 없다 꽃은 찬란한 유언이다
문철수 시인 /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생명을 살린다 뒷자리 하나는 늘 내 차지였다 포장된 노선을 달리는 버스는 환영받지 못했다 비포장 언덕길 노선이면 좋고 자갈길이면 더욱 구미가 당겼다 아스팔트길은 그냥 태워준다 해도 피했다 그러나 종점이 하나뿐인 94번 성진상운 시내버스는 예외였다 나이든 기사의 눈을 피하지 않아도 안내양 누나는 눈만 흘길 뿐 막아서지 않았다 빈차는 더 덜컹거렸고 덜 흔들리는 전망 좋은 앞자리는 재미가 없었다 이야깃거리는 늘 출입문 뒤쪽에서 만들어지고 인연과 욕망도 거기서 발아했다 둘이 건 셋이 건 자주 그랬던 것처럼 혼자였건 너무 멀리 옸다 생각 들지 않았다 출발점과 종점이 하나뿐인 노선이었다 "어디 가서 과부 자식이란 소리 듣지 마라" 족쇄 같은 한마디 꼿꼿하게 박혀 있다 노지의 거친 삶 덜컹거려도 아직 끊어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서게 하는 질긴 그 한마디 -<시에> 2022, 겨울호
문철수 시인 / 선택
물을 올리지 못하는 가지는 낙엽을 만들고,딴에 단풍인 줄 아는 것들은 힘겹게 매달려 있다
가뭄에 뿌린들 지치지 않았을까 줄긴들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리지 않았을까 잎인들 함께 살아남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모두를 살릴 수 없을 때 누군가는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꾸며내고 미화해야 할 때
그 거짓을 밑천 삼아 하나씩 죽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을은 사실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고
문철수 시인 / 세연교에서
서귀포항 세연교를 지나는데 쭈뼛쭈뼛 카메라를 내민다
찍어 드릴까요? 근데 다리조명이 배경으로 나와야죠? 그러려면 앞으로 많이 나오셔야 돼요
덜컥 지난 일들이 스쳐간다 한때는 너를 알기 위해 지독히도 네 안으로만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철수 시인 / 전지剪枝
사람을 만나는 일은 가지하나 더 키우는 일이다 누군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지만 마음에 또 다른 마음 하나를 접목하는 일이다 시간이 가면 가지가 늘지만 부러지기도 열매를 맺기도 한다 때론 전지를 하기도 해야 한다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나만의 노력으로 된다고 하겠지만 그건 잘린 가지에서 오래도록 흘러내리는 나무의 진액을 보지 못함이다 배려라는 항생제가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를 전지할 때 나는 잘려나가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돌아 볼 일이다
문철수 시인 / 강이 바다가 되는 법
주저 않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어쩔 수 없이 밀려가는 것이지만
하나가 아니면서도 하나인 척 꼬리를 잡고 끌려 가는 것 때론 떠밀려 앞서 가는 것 피동이나 수동의 습성을 감추고 자동이나 능동의 위선을 뽐내는 것
넓고 깊은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고 검푸른 파도에 미친 척 몸을 맡기는 것 투명한 싱거움을 포기하고 나는 원래 짰었다고 자위하는 것
과거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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