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성 시인 / 자화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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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시인 / 자화상
네틀에 갇힌 물큰한 흔적 묵언의 귀 기울이는 풀꽃 나 보다 나를 더 잘 알아보는 내 눈 속에 그가 있다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 어느새 고스란히 눈에 긁히는 바람을 잡고 흔들거리는 향기를 한 줌씩 흘리고 있다 허공 가득 짙푸른 숲 그려 놓고 내 눈동자 속 불붙은 산 하나가 타는 중이다 수심을 재지 못한 가슴 너보다 내가 너를 더 많이 보았을 얼굴 말문이 닫힌 인연 견뎌낸 꽃이 내 눈 속에서 천착된 기억을 태우고 있다 마른침을 삼키는 눈빛 훨훨 다 잦아들어 버리면 그 시작의 끝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김대성 시인 / 봄밤
성북천을 끼고 돈암 시장 왼쪽 울타리가 된 벚꽃 어둠을 흔드는 왁자지껄한 수다가 풀린 눈 속에서 시끄럽다 재잘거리는 너는 한 며칠 머물다 가겠지만 삶의 벼랑 끝에 둥지를 튼 선술집 사천이 고향이라는 나성댁은 어느 해부턴가 하얗게 매듭처럼 심궈놓은 꽃이 가슴에 가득하다 그 사연 한올한올 풀어져 꽃 향을 녹이는 늘어진 그림자 손끝에서 발끝까지 말초 신경을 자극하듯 심사를 들쑤셔놓는 꽃에 뿌리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잔인한 사월이 돈암동에 있다
김대성 시인 / 아버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습니다 마냥 곁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집 앞,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큰 소리로 부르는 이름은 저였습니다 달려 나가 마중하면 꼭 끌어안고 볼 비비면은 까슬까슬한 수염 술 냄새가 그리 좋았습니다 그때는 진짜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때를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당신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김대성 시인 / 저녁밥
소신공양 담아 올린 여느 밤처럼 마주앉아 끼니를 때우고 있다 네 숟가락이 된 나 입속을 들락거리며 욕을 채우고 있다 창밖 밤 벚꽃 화들짝 웃는 소리가 열세 살 소녀 심장 쿵쾅거리는 혀끝에 닿으면 별들도 반짝 눈을 감는다 무념을 꼭꼭 씹어 삼킨 호락호락한 맛에 취해 파닥이다가 견딜 수 없이 분열하는 끈끈함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궁핍의 울타리 속 훌쩍거리는 소쩍새까지 먹어 치우는 지금 단단한 순간 숟가락과 입 사이 해탈의 강을 건너 먼 불빛처럼 슬픔이 익어가는 저녁 뚝베기 안 된장찌개 속에서 함께 봉인된 시간 나를 가슴에 쥔 당신은 지금 노랗게 핀 칼세올라리아 꽃이 되어 창백한 초사흘 달 속에 있다
김대성 시인 / 돈암동의 몸살
서울에서 제일 큰 달동네 흔적을 삼킨 회색의 바다를 둥둥 떠 꿈속에서 헤매다 수평선 끝 손짓 잡으려다 꿈틀 눈을 떴다 영구 임대 주택 유리창 밖 빈 나뭇가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지 끝에 멈춰버린 하늘 하얗게 질려 있다 너와 나도 찌르고 찔려 뾰족한 끝 하나씩 가슴에 박혀 있다 탁배기를 담았던 노란 주전자 물과 대추를 넣고 불을 켰다 바짝 마른 하루가 달싹 솟아오른다 미열에 뒤척이는 내 몸처럼 끓는 물속에서 다글거리며 뒤엉킨 대추알은 어느 해 떠들썩하게 입적한 큰스님의 사리 같다 몸살은 누군가, 나를 끓이는 것인가 세대위 간부의 죽음 머릿속 찌끈거리는 아우성 산동네 하나를 짊어지고 사라진 재개발 사업 노제를 지냈던 신흥사 입구 건널목 빨강 신호등에 멈췄다 천 개의 손으로 눈을 가린 관세음보살님 황색 등 속에서 묵언 수행 중이다
-시집 <돈암동 엘레지> 한국문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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