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대성 시인 / 자화상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7. 18:05

김대성 시인 / 자화상

 

 

네틀에 갇힌 물큰한 흔적

묵언의 귀 기울이는 풀꽃

나 보다 나를 더 잘 알아보는

내 눈 속에 그가 있다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 어느새

고스란히 눈에 긁히는 바람을 잡고

흔들거리는 향기를 한 줌씩

흘리고 있다

허공 가득 짙푸른 숲 그려 놓고

내 눈동자 속 불붙은 산 하나가

타는 중이다

수심을 재지 못한 가슴

너보다 내가 너를 더 많이 보았을 얼굴

말문이 닫힌 인연 견뎌낸 꽃이

내 눈 속에서 천착된 기억을 태우고 있다

마른침을 삼키는 눈빛

훨훨 다 잦아들어 버리면

그 시작의 끝

거울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김대성 시인 / 봄밤

 

 

성북천을 끼고 돈암 시장

왼쪽 울타리가 된 벚꽃

어둠을 흔드는 왁자지껄한 수다가

풀린 눈 속에서 시끄럽다

재잘거리는 너는 한 며칠

머물다 가겠지만

삶의 벼랑 끝에 둥지를 튼 선술집

사천이 고향이라는 나성댁은

어느 해부턴가 하얗게

매듭처럼 심궈놓은 꽃이

가슴에 가득하다

그 사연 한올한올 풀어져

꽃 향을 녹이는 늘어진 그림자

손끝에서 발끝까지

말초 신경을 자극하듯

심사를 들쑤셔놓는 꽃에 뿌리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잔인한 사월이 돈암동에 있다

 

 


 

 

김대성 시인 / 아버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습니다

마냥

곁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집 앞,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큰 소리로 부르는 이름은

저였습니다

달려 나가 마중하면

꼭 끌어안고

볼 비비면은 까슬까슬한 수염

술 냄새가 그리 좋았습니다

그때는 진짜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때를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당신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김대성 시인 / 저녁밥

 

 

소신공양 담아 올린 여느 밤처럼

마주앉아 끼니를 때우고 있다

네 숟가락이 된 나

입속을 들락거리며 욕을 채우고 있다

창밖 밤 벚꽃 화들짝 웃는 소리가

열세 살 소녀

심장 쿵쾅거리는 혀끝에 닿으면

별들도 반짝 눈을 감는다

무념을 꼭꼭 씹어 삼킨

호락호락한 맛에 취해 파닥이다가

견딜 수 없이 분열하는 끈끈함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궁핍의 울타리 속

훌쩍거리는 소쩍새까지 먹어 치우는

지금 단단한 순간

숟가락과 입 사이

해탈의 강을 건너 먼 불빛처럼

슬픔이 익어가는 저녁

뚝베기 안 된장찌개 속에서

함께 봉인된 시간

나를 가슴에 쥔 당신은 지금

노랗게 핀 칼세올라리아 꽃이 되어

창백한 초사흘 달 속에 있다

 

 


 

 

김대성 시인 / 돈암동의 몸살

 

 

서울에서 제일 큰 달동네 흔적을 삼킨

회색의 바다를 둥둥 떠 꿈속에서 헤매다

수평선 끝 손짓 잡으려다 꿈틀 눈을 떴다

영구 임대 주택 유리창 밖 빈 나뭇가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지 끝에 멈춰버린 하늘 하얗게 질려 있다

너와 나도

찌르고 찔려 뾰족한 끝 하나씩 가슴에 박혀 있다

탁배기를 담았던 노란 주전자

물과 대추를 넣고 불을 켰다

바짝 마른 하루가 달싹 솟아오른다

미열에 뒤척이는 내 몸처럼

끓는 물속에서

다글거리며 뒤엉킨 대추알은

어느 해

떠들썩하게 입적한 큰스님의 사리 같다

몸살은

누군가, 나를 끓이는 것인가

세대위 간부의 죽음

머릿속 찌끈거리는 아우성

산동네 하나를 짊어지고 사라진 재개발 사업

노제를 지냈던 신흥사 입구 건널목

빨강 신호등에 멈췄다

천 개의 손으로 눈을 가린 관세음보살님

황색 등 속에서 묵언 수행 중이다

 

-시집 <돈암동 엘레지> 한국문연, 2018-

 

 


 

김대성(金大成) 시인

1957년 부산 출생. 서울에서 성장.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2010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돈암동 엘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