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 시인 / 가을햇볕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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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 시인 / 가을햇볕
울음소리들이 별과 달들로 다 빠져나간 매미의 허물 속으로 햇볕이 떨어져 쌓였다 미나리모를 뿌려놓은 미나리꽝으로 풋풋한 향이 출렁거리며 차올랐다 먼 북방에서 바닷물을 가르고 내려오는 명태의 지느러미 소리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고단한 식솔들의 발부리보다 먼저 자박자박, 골목길을 두드리는 날이었다 코끝이 뭉툭하니 싸늘하게 식어가던 식탁이 노을 한 냄비를 보글보글 끓여 내놓고 있었다
문정 시인 / 그림자 치료
많이 아파 병원에 간 적 있다 병명을 모른다 했다 걱정하는 이들이 여러 치료법을 권했다 음악치료, 향기요법, 색채치료, 웃음치료 등에 매달렸다 귀로 코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눈으로 입으로 가져올 수도 없어서 누워서 지내고만 있을 때 멀리서 온 당신이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무의 깜깜한 우물 속에서 푸른 이파리가 고여 오르듯 꽃봉오리가 먹장구름의 무거운 엉덩이를 밀어 올리듯 당신의 손안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 그림자의 손을 잡고 일어선 날 있었다
문정 시인 / 절
우리 집에서는 땅에 묻힌 어머니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늙은 아버지의 하나 남아 있는 신념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처삼촌 묘 벌초하러 가는 심정으로 처갓집 양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로 갑니다 장모님 혼자 지내는 제사를 지내주러 갑니다 말하자면 아내나 새끼들에게 직접 핏줄이 닿지 않은 분이니 절을 하지 않아도 문제 될 것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절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고민의 바닥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말과 몸을 나와 치고 받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와 새끼들을 기르는 아내에 닿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양할아버지를 꿈에 뵌 날에는 하는 일이 참말로 다 잘 되었다는 장모님에게도 닿아 있습니다 결국 눈치 볼 사람 없으니 젯상에 절을 합니다 향처럼 낯선 절을 합니다 앞서간 이를 땅속으로 더 깊게 밀어 넣기라도 하듯 바닥을 누르며 절을 합니다 바닥에 절이 바짝 닿을수록 바닥은 금방 절을 밀어냅니다 그래도 나는 바닥을 눌러 다지듯 절을 하고, 바닥은 그래도 나를 다시 밀어내는데, 문득 한 생각이 따라 일어섭니다 절은 바닥의 탄력이고 바닥은 절들이 눌러서 단단하다는 생각이 또 다른 바닥을 이룹니다
문정 시인 / 소금 씻는 엄마
자정도 훨씬 지난 시각, 욕실에서 쏴아 밀려드는 물소리가 가까스로 살갗까지 차오른 잠을 창밖으로 휩쓸어가 버린다 우리 엄마, 꿈속에서 하늘의 별들이 하도 반짝여 정월 그믐날 간장 담글 굵은소금을 씻고 있노라고, 나는 어제 취직시험도 별똥처럼 쨍그랑쨍그랑 깨져버렸다고 창밖의 벚나무처럼 달팽이관에 소름들이 줄줄이 솟아올랐다고 엄마 등 뒤에 서서 투덜투덜 오줌을 내갈기다가 파래진 손으로, 팔딱거리는 핏줄로 욕조 안의 소금을 저어대는 엄마를 흘깃 내려다본다 소금이 먼저일까 바다가 먼저일까? 엄마가 물결처럼 굽실거리며 욕조에서 손바닥으로 소금을 건져 올린다 창밖 벚나무의 달팽이관을 다독이듯, 나는 거실에 자박자박 은박돗자리를 깔고 엄마는 스륵스륵 소금을 펼쳐 넌다 잘 마르라며 엄마가 베란다 문을 열자, 귓속의 달팽이관이 후루룩 벚나무의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벚나무 가지마다, 파란 물결이 출렁출렁 차오르고 소금처럼 새침한 꽃망울이 다닥다닥 돋아나는 중이다
-천년의 시작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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