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백향옥 시인 / 클로이스터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7. 18:21

백향옥 시인 / 클로이스터

 

 

 

닫힌 문이라고 생각할 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먼지 쌓인 낡은 벽을 밀면

문이 열리고

회랑에 둘러싸인 오래된 정원에 이른다

이곳은 무덤과 우물이 있던 곳

집필실과 기도실을 오가는 흔들리는 등불은 없다

 

긴 사제복을 끌며 돌아나가는

등 굽은 사제의 그림자 사라진 적요한 낙원

불 켜지지 않는 정원에 오렌지 나무가 자란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회랑에 걸터앉아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깜빡 잠에 들면

달콤한 잠 속에서 출구 없는 클로이스터를 돌고 돈다

 

아마도 너는 이곳을 빠져나가 남쪽의 광장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로

광장의 노파에게

찌그러진 오렌지를 사서 기차에 오르겠지

 

클로이스터에서 자란 동그란 햇살이 굴러떨어진다

일시에 오지 않고 일시에 사라지지 않는 어둠

어둠은 한 번도 늦지 않고 와서 캄캄하게 머무른다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김포 글샘 60~61 페이지, 2022년)

 

 


 

 

백향옥 시인 / 처음 가는 길은 연애 같은 것

 

 

빈 들판을 걷다가 알았다

떠나고 싶은 지독한 열망들이

단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임을

 

들에서 맨몸으로 대지와 허공을 받아들인다

자연이라는 만식전* 앞에서 춤을 추듯

무녀들

초록의 무녀들

비끼는 햇살에 몸을 떨며 신탁을 받아 적던 나뭇잎이라는

무녀들처럼

 

수풀 속에선 새 소리

새들의 소리가 들불처럼 타오른다

소리의 소나기로 들어가는 너

 

어떤 소리를 듣고 나면 지독하게 앓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입술도 달싹일 수 없어

풍경이 약이 되지만 치명의 독이 되기도 한다

 

새들이 떠날 준비를 한다

곧 들판이 비워질 것이다

 

파란 하늘이 너무 파랗다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계간 『詩하늘/통권 100호 특집』 (2020년 겨울호)

 

 


 

 

백향옥 시인 / 나비가 온다

 

 

나를 풀어서 고치를 짓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 그를 기다린다

말을 잃고 시력을 잃고 갇혔다

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동풍이 불고 안녕한 오늘, 해를 향해 걷는다

샤콘느를 들어도 슬프지 않은 새벽, 숲은 낮은 바람 소리를 보내준다

사라진 슬픔을 보내준다

 

비바람 속을 걷는다

비 오는 들판에 머무르면 알게 된다

살아있는 것은 젖지 않는다는 것을

 

안개 너머엔 무엇인가 있다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강물 속으로 숲이 들어오는 시간

새벽 강가에서 고양이가 기대는 온기로, 그만큼의 기울기로 나비가 온다

 

초록의 계보에 속한다고 믿으며, 모르는 일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아직 사라지지는 않은 길에서 기다릴 수 있다

봄의 열매는 돌처럼 단단하고

나뭇잎은 나비 날개만큼 여려서 만져보면 살고 싶다

 

나비 돌아온다

 

 


 

 

백향옥 시인 / 물을 품다

 

여름의 끝에 우리는 모였다

논과 밭 사이 툼벙에 오디가 실하게 열리는 뽕나무 있는 그 곳에

대처에서 돌아온 오빠들과 함께 보낸 잎 푸른 날

툼벙의 물을 퍼내는 걸 “물 품는다” 했다

해 걸이를 하며 작은 저수지의 물을 품었다

웃음 많은 아버지가 흘려보내고 남은 물을 양동이로 퍼내면

은빛 허리를 파닥이는 물고기들

크게 자란 붕어와 미꾸리를 잡느라 벌어지는 즐거운 소란

미끄러지며 달아나는 탱글한 것들을 붙잡았다

넘실거리는 아욱 잎을 뜯어 국을 끓이거나 호박잎을 찌듯이

감자를 캐듯이 물속에서 자란 과실을 따먹는 거리낌 없는 자연의 날

흙탕물을 튀기며 달아나는 것을 잡고

깻잎이랑 고추를 따다 놓고는

화덕에 건 솥 안에서 어죽이 끓는 동안

산 그늘 냇가 차고 맑은 물에서 놀면 입술에 오디 빛이 돌던 여름날

툼벙 진흙에 발이 빠지는 질척임과 끈끈함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달라붙은

물을 품은 날, 물 속 같은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갔다

그 여름에서 멀어져 선잠을 깨는 날들, 푸석한 몸이 물을 부른다

품 속 가득 물을 안는다

​​

-계간 『詩하늘』 (2024년 봄호)

 

 


 

 

백향옥 시인 / 백야를 데려오는 새

 

 

흰 들판에 홀로 선 나무가 흔들린다

 

새가 백야를 몰고 날아온다

저물지 않을 것 같은 빛 속으로

멀리서 온 새를 백야라 부르고 싶어

저녁에 머무는 아늑한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바다를 건너오느라 젖은 날개에서 울음이 쏟아진다

극지에서 온 새를 위해 해가 지지 않기를

어둠이 짙어지지 않기를

 

어둠을 벗어나도 다 환한 곳은 아니고 먼 겨울을 떠나면 겨울에 도착한다

문을 열고 나가면 다른 곳, 다시 만들어지는 밤

 

멀리에서 떠나와

묶인 채 살아가는 나무

홀로인 나무가 제 안에서 새를 꺼낸다

둥근 것을 키우는 방식으로 나무는 멀리 간다

 

흑백 영화를 보고 백 년 전 레코딩을 들으면 아늑해지고

멀리서 환한 빛이 돌아온다

주파수처럼 새가 오는 날

 

나무가 내려앉는 숲에서

해가 지지 않아 우리는 무성해진다

 

 


 

백향옥 시인

1968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김포문예대학 23기 수료. 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