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가정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7. 18:30

서정연 시인 / 가정

 

 

"지키느라 죽는줄 알았다."

 

 

 어제 읽은 시다. 단 한 줄이다. 하지만 저 안에 담긴 말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사랑, 사람, 삶이면서 우리 모두의 삶의 근간을 돌아보게 한다.

 

 그냥, 저 안으로 들어가 구석탱이에 앉아 있고 싶었다. 더 이상은 사족일 거 같아서.

 

 


 

 

서정연 시인 / 사월의 노래

 

 

사월이면 꽃씨를 심겠어요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으며

낮은 목소리로 꽃씨를 심겠어요

작고 여린 꽃씨는

당신을 부르는 낮은 음처럼

날마다 자라겠지요

 

당신은 닿지 못하는 시간에 있어도

보랏빛 꽃 흔들겠지요

어쩌면 당신도 흔들릴까요

 

사월이면

푸른 머리카락 속에 꽃씨를 심겠어요

반쯤은 피겠지요

 

-시집 ‘목련의 방식’ (문학의 전당)에서

 

 


 

 

서정연 시인 / 시계 수리공의 아침

 

날지 못하는 새

그렇다고 부력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해가 뜨는 것을 보려고 한 곳을 향해 서 있는 펭귄

그 중에서 어느 누군가는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생각했어

증명이라도 하듯 딛고 선 발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종종 어두웠다

불현 듯 부고를 받았을 때

문틈에 손톱이 뭉개졌을 때

너의 작은 날개에 생채기가 나던 그때도

 

만질 수 없을 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대체 불가한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 또는 쉬이 지는 꽃잎에 대해서도

 

누군가 내민 손을 미처 잡아 드리지 못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고 훗날 깨달았으나 영영 늦었으나

그래서 상처의 흔적은 드문드문 생경하다

 

꽃잎이 흩어질 때

다행스럽게도 지나가는 바람이 붙잡아주었다

 

새벽녘 랜턴 불빛 따라 풀숲을 헤치고 가쁜 호흡을 견디며

어느 먼 데 올라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쓰는 펭귄처럼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사람들

불빛은 점점이 잦아들고 가장 어두운 시절

 

밤 사이 별이 된 사람과 나눈

느린 곡조와 서쪽 하늘로 흘러가는 은하수

 

시계 수리공은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고장난 시계 태엽을 감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서정연 시인 / 청노루귀

 

 

새벽처럼 모가지가 긴 들꽃이야

낙엽 덮인 발끝을 봐

꽃잎이 피고 나면

내 가슴 한편에서도

노루귀 닮은 청색이 차박차박 차오르는

소리 들리지

노루의 귀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리움에 물든 새벽이 걸어오는 거야

 

멀리 있는 네 목소리도 어쩌면

들려올 것만 같은, 귀 하나

돋아나는 거야

 

 


 

서정연 시인

전남 나주 출생.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목련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