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양승림 시인 / 수상가옥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7. 18:38

양승림 시인 / 수상가옥

 

 

 거기에서는, 다 뜬다. 배도 뜨고 집도 뜨고 찌푸라기도 뜨고 고양이와 강아지도 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뜨고 땔나무도 뜨고 물에다 씻어버린 생선비린내도 뜨고 은과 주석이 2대 8로 섞인 술잔도 뜨고 별과 달도 뜨고 메콩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쇼팅 깡통과 22인치 중국산 흑백 TV도 뜨고 오줌도 뜨고 구멍난 철조망도 뜨고 막내 삼촌 비명을 잡아먹은 발목지뢰도 뜨고 어망에 꽂힌 리알도 뜨고 토종닭과 집오리도 뜨고 앙코르 왓트 일몰도 뜨고 시엠립 국제공항도 뜨고 선박용 엔진 오일도 뜨고 크메르 루즈 군도 뜨고 심지어 떠 있던 물까지 한 번 더 뜨고

 

 마음에 부력만 있으면, 무조건 다 뜬다. 죽은 사람들과 거기를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나만 가라앉는다

 

 거기에서는 콘돔도 쓰지 않는다. 모든 걸 물로 씻어버린다

 

계간 『시와 세계』 2012년 봄호 발표

 

 


 

 

양승림 시인 / 지금은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

 

 

옛날엔 집에서 콩나물을

직접 길러 먹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 바닥에

검은 재를 깔고

아침저녁으로 따박따박 물도 주고

 

그러나 우리 집 콩나물은 항상

대가리가 퍼랬다

 

나는 늘 시루 안이 궁금했고,

수시로 검은 보자기를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대가리가 퍼래진 콩나물은

모두 버려야 한다

비려서 못 먹는다

 

지금은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

 

시루 안이 아무리 궁금해도

노오란 콩나물 대가리처럼

공손히 두 손 모으고,

조용히 어둠을 견뎌야 할 때

 

 


 

 

양승림 시인 / 음식이 말을 걸다

 

 

앞으로 뭔가를 먹을 때,

꼭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너 먹어도 돼?

간장 한 종지라도 그렇게

앞에 놓고 묻다보면

내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독선적이었나를

그리고 밥풀 묻은 숟가락 하나라도

앞에 놓고 그렇게 묻다보면

누가 압니까

토종닭처럼 살아온

나의 지난 날이

벌레 물려 가렵던 상처처럼

덧나기만 하던

나의 희망들이

마침 내 날 용서하고

어느 시골

허름한 국밥집

쇠고기 다시다처럼

껴안아 줄는지.....

 

-계간 『시와세계』 2015년 여름호

 

 


 

 

양승림 시인 / 지금은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

 

 

옛날엔 집에서 콩나물을 직접 길러 먹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 바닥에 검은 재를 깔고

아침저녁으로 따박따박 물도 주고

 

그러나 우리 집 콩나물들은 항상

대가리가 퍼랬다

 

나는 늘 그 시루 안이 궁금했고, 수시로 검은 보자기를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가리가 퍼래진 콩나물은 모두 버려야 한다

비려서 못 먹는다

 

지금은

조용히 기다려야 할 때,

 

시루 안이 아무리 궁금해도

노오란 콩나물 대가리들처럼

 

공손히 두 손 모으고,

조용히 어둠을 견뎌야 할 때

 

 


 

양승림 시인

1961년 춘천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졸업. 2010년 《시와 세계》 신인상 시부문에 〈철학은 돼지다〉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현재 '바람' 동인으로 활동 中. 경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