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석균 시인 / 대작(對酌)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7. 19:06

이석균 시인 / 대작(對酌)

 

 

7번국도 삼팔선휴게소 500미터 전

동해와 마주보고 섰다

날아올라 달려드는 배추흰나비들

뒷걸음질은 늦었고

바짓가랑이 젖어버렸다

 

오래된 가슴 용기 내어 내밀고

파고드는 비린내를 들인다

배가 충분히 불러올 무렵

조금 전 헤엄치던 살점들 앞에 놓고

평평한 돌 하나 골라 앉아

소주를 따른다 종이컵은 두 개다

한 잔은 손에 들고 한 잔은 너의 잔

들이켠 독한 술 내시경 되어

상한 속 여기저기 따갑다

얼른 살점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살점들이 다 비어갈 때쯤

하늘이 빨갛게 달궈졌고

비린내가 구워져 접시에 채워졌다

아줌마 다시 안 불러도 되겠다

혼자 있긴 아까운 곳 혼자 와서

대작(對酌)하다 보니 바다가 취했는지

제가 먼저 비틀거린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바다는 어느새 까맣게 탔고

일어서려는데 너의 잔이 남았다

할 수 없이 가스램프를 꺼내고

빈 잔에 남은 바다를 따른다

바다는 제 잔을 마신다

 

 


 

 

이석균 시인 / 권태의 생산

- 원헤어에서 머리카락을 세다가

 

 

파마는 허용되지 않았다

 

키는 늘 같아야 하니까

토르소는 화실이 아닌 길에 전시되고

톱 연주자들의 버스킹은 지시된 것이다.

소음에 먹혀 버린 비명 슬픈 굿바이

원헤어 박원장은 웃으며

며칠 지나면 예뻐진다고 했다

비만한 조각들이 실려가

둘러앉은 노래를 마시며 분신 할 때

바람이 고양이 발톱처럼 사나워지면

상흔들은

뛰다가 날다가 그렇게

흙이 되어 괜찮은데

개다리 춤을 추던 연주자가 추락했다

은퇴를 하지 못한 사내는

그 이유로 톱을 들었고 상처들처럼

부러진 것이다.

거리는 여전히 키를 맞추고 있고

세다가 지칠 때는 잠시 자고 가야한다

아내의 머리를 쓸며

그래도 괜찮아 아직 붙어 있어서

통증을 참아내었다

그는 개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다

청구서만 팔랑거릴 뿐

 

길에선 다른 사내가 연주를 한다

 

-시집 『날이 계속 맑으면 땅은 사막이 된다』 에서

 

 


 

 

이석균 시인 / 요절 부고

 

 

 유치원 갔던 동료 아이의 요절 부고를 받고는 아빠가 되었어, 아빠가 되고 아이 엄마는 아내가 되고 그러다 아이가 되는 것일까, 아빠가 되었지만 아빠 자리에 서지 못하고 아내가 된 아이 엄마는 옆에 서지 않았지, 마침내 아이가 되고도 눕지 못했어, 결국 앉지도 서지도 못했지, 아이는 혼자 웃고 있었어

 

 또 아빠가 오고 엄마가 왔지 또 엄마와 아빠가, 다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가 되었고 아이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아이들은 웃지 못했어, 아이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웃지 못했지, 그러는 동안 아빠와 엄마는 다시 아이가 되고, 다들 아이가 되어버리면 아빠는 누가 하나 근심되었어

 

-계간 《시인정신》 2017년 여름호

 

 


 

 

이석균 시인 / 당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내게 비가 내린다

 

 

 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쓰라고 K가 강요했다 그래서 쓴다 그녀는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 시인이니까 써야만 한다 라고 일단 서두를 달아놓는다

 

 당신은 당신이지 내가 아니라서 얼굴을 들면 하늘이 보일테고 그러면 내게 비가 내릴까 베란다를 열고 하늘을 보는데 깜깜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경비 아저씨가 비를 밟고 있다 그가 얼굴을 들고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꾸벅한다 내가 꾸벅한다 꾸벅하고 꾸벅한다 머리를 드세요 당신이 당신이니까 얼굴을 들어야 비가 내리죠 비가 내려야 당신이 고개를 들고 내게 비가 내리죠 그러니까 자꾸 드세요 뭐라도 상관없어요 내가 내려갈까요 머리를 다시 들던 그가 꾸벅한다 꾸벅하고 꾸벅한다

 

 고양이가 옆에 와서 서성인다 주머니 속 내 손에 집중한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는 그녀의 꼬리 뒤 까만 풀잎을 지나 까만 콘크리트 조각 속에서 네 개의 동그라미가 동그라미를 좁힌다 꼬리의 방향에 집중할 것인데 언제나 실망을 주는 나에게 실망한다 계속 말을 거는 경비원이 귀찮아진다 고개나 들라니까요 하루에 한 번 어떨 땐 두 번 참고 참던 고구마를 뱉어내기 위해 내려오면 무척이나 심심했던 경비 아저씨는 어느샌가 내 앞에 화기를 찰칵 들이대며 말을 걸고 파란 타원이 흔들리면 어김없이 얼룩 고양이가 발치를 서성인다

 

 고개를 드세요 당신 누구라도 좋아요 그래야 내게 비가 내려앉죠 아니면 말구요 이건 비밀인데 나는 안 오면 더 좋아하거든요 일단 고개를 젖히세요

 

 


 

 

이석균 시인 / 출생의 비밀

 

 

 마구 달렸는데 혼자는 아니었지만 어머니 자궁은 안전하였고 눈을 뜨는 것은 감은 것과의 차이가 없이 먹지 않아도 배부른 그게 그리도 절실했는지 다리를 뻗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갉아버린 콘돔보다 질겨서 아직 애벌레니까 꿈틀거리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짧았던 시한부 포만 이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들과 낯선 얼굴들, 천정에는 뭔가 종일 돌고,어지러워 자주 토하던 그때부터 웃는 연습을 해야 했는데 그건 훈련이 필요한 것이었고 사실은 울고 싶었지만 웃어야 다들 좋아했으므로 계속해서 웃는 연습을 하였으니까 아무 때고 실실 웃는 것이 분명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나저나 왜 그렇게 달렸을까 그날, 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는 생각나지 않고 다만 휴지통이 아니었던 것만 천만다행이었음

 

-계간 《시인정신》 2017년 여름호

 

 


 

 

이석균 시인 / 있는데 없는 참 이상한

 

 

거울 속 남자는 표정이 없다

보이는데 없다고 말하는 그런 이상한 표정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없다

텔레비전을 켠다 아 저기는 많구나

대량 생산된 조각들이 밖으로 막 삐져 나온다

한참을 구경하다 지쳐 현관문을 열고 나선다

엘리베이터에 벌써 하나 있다

억지로 하나 만들어 보탠 뒤

급히 지운다 선착순은 아니지만

공동 현관을 나서는데

앞집 아가씨가 꾸벅한다 같이 꾸벅한다

용기를 내서 잠시 눈을 마주치고 애써 살핀다, 없다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딱 한 번

표정을 보여준 적이 있다

제조일자가 기억에 없는 흑백사진 속 등 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 구조를 만들고 있었다

인근에서 알려진 미남이었다는 아버지 얼굴을

일 초 이상 마주 본 적이 없어서

나보다 젊은

아버지를 앨범에 숨겨두었다

 

앞집 남자가 꾸벅한다

같이 꾸벅한다, 꾸벅하고 꾸벅한다

지난번에⸱⸱⸱⸱⸱⸱

아! 네 감사했습니다

다시 꾸벅하고 꾸벅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다시 지워진다

 

 


 

이석균 시인

경북 경산에서 출생. 대구대학교 특수교육, 同 대학원 전자계산교육 졸업. 2016년 《문학,선》 등단. 평택대학교 재활복지학과 외래교수 역임. 현재 인천 소재 특수학교 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