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섭 시인 / 달맞이꽃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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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시인 / 달맞이꽃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이홍섭 시인 /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젊은 날, 절에 들어와 처음 의문을 품었던 말은 무슨 거창한 화두 같은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들은 총재기가 깨진다는 말이었다
화두를 잘못 들어 한평생 행려병자처럼 살아가야 할 스님이나 화두를 잘 들어 한 소식 한 스님이나 간장 종지 같은 머리가 깨지기는 마찬가지,
종재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종재기가 깨지도록 가야 하는 그 무엇이기에 이 말 속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철마다 골짜기,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뿌리를 속으로 스며드는 더덕 향 같은 것이 이 총재기가 깨진다는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이홍섭 시인 / 입술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 하지 않겠는가
이홍섭 시인 / 어성전(魚盛) 골짜기를 지나다
고기들이 날아올라 이 봄, 골골이 꽃으로 피어난 걸까
내 가는 길은 언제나 마른 물길, 흘러도 흘러도 긴 긴 한숨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어느 여울목에서 오늘처럼 이쁘다, 이쁘다 소리치면 몸 비틀며 날아올라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서러운 그대를 안고 꽃비늘 떨어지는 이 골짜기를 굽이쳐 달릴 수 있을까
이홍섭 시인 / 폭설
간밤부터 폭설이다
내 살과 뼈가 된 강원도 오지 마을들은 또 두절이다
이런 날, 젊은 어머니는 백설기를 찌시고 천장에서 싸리꿀을 내리셨다
토끼 같았던 내 눈과 귀는 이내 순해져갔다
이홍섭 시인 / 우리 동네 나이트에서는요
우리 동네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는데요. 뭐 서울처럼 물 좋은 나이트는 아니구요. 그냥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씨들이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 눈 맞으면 껴안고 돌다가, 뭐 그러다가 스리슬쩍 자리를 뜨기도 하는 곳인데요....
며칠 전 후배 한 놈이 나이를 건사 못하고 이곳에 들렀다가 한 아줌씨한테 제대로 걸렸는데요. 그 아줌씨는 모처럼 총각 만났다며 구두 뒷굽이 나갈 정도로 신나게 놀았는데요. 문 닫을 때가 되자 잘 놀았다며 후배놈에게 지폐를 몇 장 찔러주고는 부러진 뒷굽을 들고 휘이휘이 사라지더라나요....
며칠 뒤 후배놈이 중앙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줌씨가 어물전에서 고기를 팔고 있더래요. 양손에 싱싱한 산 문어를 움켜쥐고는 시장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나요.....
후배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아줌씨가 찔러준 지폐에서 비린내가 났었다며 쪽팔려 죽겠다고 말하는데..... 이놈의 죽은 문어 대가리 같은 놈을 어물전에 내다 팔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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