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은실 시인 / 둥긂은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8. 11:04

허은실 시인 / 둥긂은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알은 둥글다 살구는 둥글다 살구의 씨는 둥글다 씨방은 둥글다 밥공기는 둥글다 밥알은 둥글다 사탕은 둥글다 별들은 둥글다 꽃은 둥글다 물은 둥글다 ‘응’은 둥글다 그 밤 당신이 헤엄쳐 들어간 난자는 둥글다 원자는 둥글다 존재는 둥글다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서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서

 

 사랑은 둥글다

 내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굴러가려고 둥글게 말린 혀가

 입천장을 차고 나간다

 나가서 너에게 굴러간다

 

 둥긂은 아름답고 둥긂은 그립고 둥긂은 입맞추고 싶고 둥긂을 안고 뒹굴고 싶고 둥긂은 들어가 눕고 싶다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둥글어져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하나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

 

-2010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허은실 시인 / 목 없는 나날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허은실 시인 / 이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 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허은실 시인 / 이별하는 사람을 위한 가정식 백반

 

 

아비는 춘궁이었네

기별 없이 찾아온 딸에게

원추리를 끊어다 무쳤네

 

풋것은 오래 주무르면 맛이 안 난다

 

꽃들에게 뿌리란 얼마나 먼가

이 맛은 수몰된 마을의 먼 이름 같군요

 

아비는 오래 얼려둔 고등어 한 손을 내었네

고등어는 너무 비린 생선이에요

잡히면 바로 죽어버린다고요

 

비린 날엔 소금으로 창자를 닦거라

 

그런데 아버지 기일에 왜

미역국을 끓이셨나요

 

너를 좋아하다가 죽은 남자가 있다는구나

새 옷을 지어다 태워주었다

 

세상에 미역처럼 무서운 것이 있을까

한 줌이었던 것이 이토록

방 안에 가득하잖아요

 

너무 오래 불리면 몸이 싱거워진다

 

검은 혀가 흰 허벅지를 휘감아요

내 몸에서 당신의 머리칼이 자라요

 

약불에 뭉근히 두어라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속이 우러난다

불로 익히는 음식이란

뜸을 들여야 하는 거야

 

누가 부르는지 귓속이

간지러워요 아버지

네가 피운 꽃들이 지고 있나 보구나

 

아침을 차려준다는

저녁을 짓는다는

그 말이 어여뻐서

숟가락을 쥐고 울었네

아비는 말없이 가시를 발라주었네

 

 


 

 

허은실 시인 / 초

 

 

아침에는 미역국을 먹고

저녁에는 탕국을 끓인다

 

아이는 소원을 빈다

 

이건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끄기 위해 켜는 불이야

너의 숨으로

 

아이가 최초로 불을 응시하는 순간

우주의 가로등 하나가 새로 켜진다

 

너는 사로잡힌다

간단없는 일렁임과

간단히 사라지는

여기에

아이와 촛불이 있다

 

촛불을 처음 본 눈이여

눈동자에 담긴 그 불꽃으로

너는 살아갈 것이다

 

아침에는 초를 끄고

저녁에는 초를 켠다

아버지 이제 케이크를 드세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린다

 

어린 외손의 생일 케이크까지

아홉 수저 드실 동안

 

너는 바라본다

산 사람들의 눈 속에서

춤추다 사그라지는 불

 

아버지는 소지처럼 떠났다

서툰 획들을 지우고

살라지는 종이의 가벼움으로

 

사라지는 글자들을 향해

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방안에는 촛불 냄새

 

우리는 술잔에 뜬 재를 마셨다

 

 


 

 

허은실 시인 / 라이터소녀와 껌소년의 계절

 

 

모두들 너무 따뜻해서

이 거리의 사랑은

일회용 라이터처럼 흔해요

 

라이터 하나에 가든과 라이터 하나에 모텔과

라이터 하나에 오빠 오빠

 

열(熱)을 잘 간수해야지 겨울이잖니

소녀들은 자신의 열을 팔아야 구두를 살 수 있어요

소년들은 껌을 팔아 소녀를 만질 수 있고요

 

엄마 신발을 신고 나와 소녀는

뺨을 맞고 울어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오빠는

무언극의 희극배우

울부짖고 있지만 우스워

모두들 너무 따뜻해서

이 도시의 눈물은 일인칭

 

울음이 얼었으니 몸을 지펴야 해요

그러나 불꽃의 시간은 짧아

소녀의 판타지가 소녀의 국경

구름의 살점들이 몸을 덮으면

소녀는 당신이 씹다 버린 껌

봉인된 허구

 

거리에서 라이터는 매일 사라지고

아무도 라이터 따위 줍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직도 잠들어 있어요

새들의 얇은 눈꺼풀만 아침을 울고요

라이터를 감춘 소년들이 망루로 갑니다

껌소년들의 이마에서 뿔이 자랍니다

 

 


 

허은실 시인

1975년 강원도 홍천 출생.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 졸업.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라디오 오락·시사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넘게 활동. 현재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작가.2018.02. 제8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