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현 시인 / 장밋빛 얼굴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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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시인 / 장밋빛 얼굴
화단에 장미가 많이 피어 있었다 오월은 오월이네 '압화'라는 단어를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 단어 때문에 장미를 보자 마음이 드러나 버렸다
마음은 80, 90, 100도를 넘어 120도가 한계인 온도계, 열 받은 온도계에 갇힌 빨강의 포화상태를 견뎌내지 못해 터져 버렸다. 말이 마구 쏟아졌다 빨강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아니? 빨강이 얼마나 위험한 색이었는지 알아? 빨갱이란 발음이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으로 내 발에 무의도와 무작위로 밟힐 수 있는 개미 목숨으로 만들었는지
장미는 몰랐다 장미는 흔들릴 뿐이었다그러나 땡볕 여름이라도 혼잣말의 온도는 낮을 수밖에 없어서 나는 가라앉았다 행복한 결말은 아닌게 장미를뜯어 왔다는거, 가시가 아닌 장미를 데려와서 결국 결과로 만들었다
장미의 부검의가 있다면 이렇게 말했겠지 "이 그림자의 사인은 질식사입니다." 장미와활자가 한몸처럼 누워 있는 걸 볼 때 빛이 눈을 덮는 각도에서만 저 무테안경의 광합성이 보는 사람의 착각이라도 좋아, 빛이 나니까 음험한 눈 따위 안 보이고 빛이 나니까 오월은 오월, 오! 감탄하듯이 오월 O! 둥근 입으로 젊은이의 피부를 보며 찬탄하는늙은이의 주름 앞에서 해맑은 얼굴로 이거 좋은 스킨인데 써 보시는 건 어때요? 달팽이 점액질로 만들었다고 해요 skin에 바르는 스킨을 건네는 기분으로 오월의 장미를, 드러누운 장미를, 납작한 장미를
바람이 불어도 이제 흔들릴 줄 모르는장미는 바람이 불어도 이제 비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장미는 칠월까지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았다 칠월초부터는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고 이후부터 무더워진다고 한다
비 온다, 비오네, 친구에게 「언어의 정원이란 영화가 온통 빗소리로 가득하다고 언제 한번 보라고하고는 작업실을 나오는길 우산을 폈다 우산살은 막을 팽팽하게 당겨야 음질이 살았다 꽃이 가득한 그 우산이 촌스러워서 낮게 썼던 내가 장밋빛 얼굴이었던 것은 장미 우산을 펼 때마다 쉽게 맺히는 땀 때문이었을까
김준현 시인 / 비가 왔으면 좋겠다
수채화처럼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다
피아노를 치듯 툭, 툭 비가 왔으면 좋겠다
길고양이에게 물을 주고 초록을 더 진한 초록이게 노랑을 더 빛나는 노랑이게 해 주기를
사람들이 저마다 알록달록한 우산을 날개처럼 펴고 웅덩이를 건널 때는 띄어쓰기하듯이 새처럼 톡, 톡 건너면 좋겠다
비닐우산을 쓰고 빗방울이 움직이는 걸 봐도 좋고 우산 없이 흠뻑 젖을 수 있어도 좋겠다
연못과 호수와 웅덩이가 동글동글한 입을 벌리고 달팽이가 두 눈을 느리게 내밀고 새들이 젖은 속눈썹을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좋겠다
비가 그치고 나서 세상이 더 맑고 분명해 보인다면 좋겠다, 좋겠다
김준현 시인 / 스탄 친구들
스탄 친구들을 조심해야 해 게스트하우스에서 남부 지방 한국어를 쓰는 남자가 말했다
드럼 속처럼 하얗고 찬 독방을, 밖으로부터 나를 치는 발소리를 종이의 뒷면과 나의 낯을 혼동했다 그리러 왔는데 여기는 온통 눈뿐이다, 흰색 물감은 어떻게든 존재하려고 하고
물감을 머금은 붓은 끝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상한 끝말잇기 끝에 붓을 놓고 나면 머릿속에서 얼굴을 그렸다. 위험한 얼굴들
채도가 높은 턱수염 및 “담배 냄새와 신앙심이 몸에 밴 자들이지” 특히 택시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내가 모르는 키릴 문자의 지명으로 가는 택시의 방향과 속도가 이상해질 때
자세히 봐, 룸미러의 두 눈의 방향과 속도를, 떼거지로 우글거리는 가족 사진과 십자가를 닮은 이상한 문양이 없는지 그런 건 숨길 수 없거든,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에서 왔다면 입속의 교정기가 이의 의외를 가두고 있는 중이므로 나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러 왔다. 이렇게 휜 게 많아서 그리러 왔다 그리러 그리고 그리러 그리고 극동의 미술관은 사람 눈빛의 유배지들로 가득하다 나는 이어폰 속에서-이어폰은 수혈의 형식으로 귀를 뜨겁게 만들어주니까-시로 쓰려던 문장이 이어졌다-내 독감은 세계의 독감-콜록콜록-이것 말고는 재채기를 표현하기 힘든 한국어-목적지는 게스트하우스-어제 처음 만난 남자의 말-스탄-스탄-스탄
냉혈이 가능한 계절 여기서는 누구도 쉽게 웃지 않는데 어디로 가세요? 흰 이를 드러내며 검고 짙고 속을 헤아릴 수 없는 턱수염으로 입을 벌린 말이 번역기를 통과했다 “어디로 가세-요?” 번역기는 제가 얼마나 이상한 억양으로 말하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연락을 무음으로 해놓은 상태였다 눈은 아무리 내려도 무음이다 무음 속에서 택시는 사라졌던 내 앞에 도착했다 "안녕히 가세요." -스탄, 당신은 스탄입니까? 무엇으로 시작해도 -스탄으로 끝이 납니까? 무음 속에서 말을 걸고 돌아와 사람에게 버려진 철길이 천천히 붉어지는 풍경을 그리고 경전을 그렸다 경전의 옆구리 금박으로 빛이 나는 두께를 짊어진 그 남자를 그렸다 -이제 이 속에서 살아요,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도, 이상한 눈초리도, 눈사람처럼 서 있는 손님도 다 버려두고 여기 들어와 살아요 그래, 알고 있다. 이게 나쁜 짓이라는 것을
손이 얼었다. 냉혈이 되기 쉬운 러시아어가 희고 긴 입김을 동반했다 스탄 친구들의 영혼이 담긴 것처럼 희고 긴 통화 중이다
김준현 시인 / 꽃잎과 뿌리의 장거리 통화를 엿들었다
"거기는 낮이니? 여기는 밤이란다." 뿌리가 말했다. "아니 여기도 밤이에요 엄마, 오늘은 좀 춥네요." 꽃잎이 말했다
꽃잎이 떨면 뿌리도 떨었다 밤새 울었던 흔적이 잎에 맺혔다
둘의 대화에서 물소리가 났다
김준현 시인 / 커피와 영혼
커피에 든 내 영혼을 빨대로 마셨다 카페인이 지나치다 이 호흡을 커피를 위해 쓸 것이다 지난번에는 풍선을 위해 썼는데 아까웠다 며칠 동안 풍선의 노화가 진행되었지 쭈그렁망탱이가 되었지 삶이 다했네 얼굴이 다했네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대로 영혼을 남은 영혼을 누워서 보내는 사람에게 살 만큼 살았다는 악담을 하는 느낌이랄까? 빨대 말고 주사라면 어떨까? 주삿바늘은 늘 깊은 데까지 슬프고 피의 길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균인지 나그네인지 거기에 세워 둘 수 있을까?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면 일상처럼 하는 일인데 의대를 나오려면 영혼을 얼마나 마셔야 하는지, 밤은 커피 향으로 가득하고 굳은 목을 풀며 올려다 본 밤하늘 별자리는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혈관 같을 거야 내 눈에는 빛 네 안경에는 빛 16개월 아기가 만진 안경 렌즈에 안개가 묻었다 닦으면 잘 보이겠지만 안경닦이가 없고 시력 0.1과 안갯속 세상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영혼의 이분법 어때? 잘 것인가 혹은 영화 「Soul」을 다 볼 것인가 이제 커피는 제 기력을 다했고 나는 자야겠지 우주복 내부의 산소량을 체크하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아침까지 무사하기를 빌며 굿나잇
김준현 시인 / 매일 화성을바라보기 시작한 너의 구조적 결함 내가 밝혀낸 너의 시 세계 및 구조는 다음과 같다 부추가 지처서 동맥이 비치는 만두피의 얇음 금이 가고 있는 봄의 바다 그곳에 있던 달팽이의 밟힘 양쪽으로 짝 펼친 책 밑을 훈는 빛의 해맑음 너는 들킨 거다 그래 들켜 버렸네 왜 그토록 빛이 비치는 일에 집중했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일은 의식적으로 해야지 저쪽을 보는 척 이쪽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억양이 센 중년의 여성들이 모여 김장을 하는 일이라거나 젓갈의 냄새라거나 개수대의 접시들처럼 울먹임이란 잘 노출되었다 카메라로 찍은 장면은 쉬위 너의 손가락 끝에서 한 장 한 장밖으로 새어 나갔다 먹을 것, 먹을 것. 먹을 것들이 있다 사람이 있다 가장 아름다울 때의 사람이 있다 아니 난 사람이 비에 젖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버퍼링이다 심장에서 기계의 결함이 발견되었다 반복하는 말하기 아름다운 추억을 일본어로만 읽기 눈과 눈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리는 눈에 시력을 주기 이걸 다 고처야 해 아니 내버려 뒤. 베란다 사과 박스에 한쪽 다리로 서 있던 병아리도 사람의 이름을 가졌으니 인생 직접 살아 봐야 아는 거다 내버려 두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피가 탁해진 너는 밤하늘의 화성을 찾기 시작한다. 눈의 시력으로 오늘 못 보면 15년 후에나 화성의 붉은빛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며칠 전에 읽은 신문 기사였다 수성도 금성도 목성도 빛뿐인 태양마저도 볼 수 있는 너의 시력이 있어 나는 이 페이지를 바람 부는 쪽에 내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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