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지 시인 / 안심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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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지 시인 / 안심
나비가 날개를 반성하는 때, 꽃이 꿀을 사람이 욕망을 자동차가 질주를,
잠 깨어 아침에 보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반성하는 때, 해파리가 분열을 고래가 저인망을 물총새가 잠수를,
점심때 식당에 가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뻐꾸기가 제 울음을 반성하는 때, 라일락이 향기를 장미가 가시를 훌라맹고가 춤을,
저녁 무렵 한 바퀴 돌아보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모두가 제자리에 있어 주어서, 내 꿈은 안심하고 다시 꿈꾸러 간다.
-2014년 시집『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방울토마토
방울토마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나는 방울토마토나무였는데, 지금은 없다. 효정이가 먹었다. 경로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그 아이들은 탐스러운 방울토마토였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국산 중량 412g 100g 당 310원 가격 1277원 포장 년월일 00.2.17. 판매처 암호 0204437012777 업종 기타식품판매업
방울토마토 지금은 빈 용기만 있다. 동글동글 잘 익은 방울토마토. 현대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다시 만났는데, 새빨간 심장 한 곽을 다시 만났는데, 지금은 찢어진 투명과 빈 용기만 있다. 아침까지 있었는데, 새빨간 심장 네 알이 내 앞에 남아있었는데, 내가, 방울토마토가, 방울토마토나무가, 한 알씩, 씻어서, 먹어서, 없다.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에서
이향지 시인 / 풀단
낫이 풀을 지나간다. 풀들은 쓰러지며 흩어진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풀로 풀을 묶어준다. 좁은 대로 풀들은 다시 뭉친다.
짧은 풀일수록 긴 풀의 위로가 필요하다. 풀이 풀을 안고 소꼴로 가는 길. 소 숨소리 가까울수록 긴 풀 오금이 풀린다.
소의 고삐도 위로가 필요하다.
풀 베는 낫도 위로가 필요하다.
개밥바라기도 위로가 필요하다.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배고픈 벌이
벌집에서 꽃까지의 길이 봄이다. 역행이 순행을 이끌어 왔다. 역행하는 벌이 없다면, 꽃이 어찌 깊은 눈을 녹였겠는가. 배고픈 벌이 꽃까지의 길을 만든다.
-시집 『햇살 통조림』 에서.
이향지 시인 / 환(幻)
두개골을 바수어 독수리에게 던져 주는 고원 사람들의 장례
매장할 만한 흙도 불태울 만한 나무도 구하기 어려운 곳 희박한 희망마저 새가 가져가는 곳
너무 깊고 맑아서 숨이 막히는 하늘을 제압하며 느릿느릿 날고 있는 빛깔 검은 무덤들만 살이 찌고 숫자를 불려 간다
하늘로 치켜 올려졌다 내리꽂히는 해머에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아주 잠깐의 햇살
새로운 피를 흡족하게 마시고 날마다 되살아나는 붉은 태양 아래서
허기진 풀들은 기다린다 독수리 배 속에 갇혀서 높은 하늘을 날다가 조분으로 돌아올 골육들을
살아 있는 납골당 길고 좁고 어둡고 구불구리는 관을 끙끙 밀고 나와 마을 밖 풀밭에서 햇볕을 쪼이며 쉬고 있는 조분 몇 덩이
새로 돋은 풀잎을 찾아 양떼를 몰고 온 아이는 젖은 조분을 피해 앉는다 그제 죽은 할아버지를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그림자가 미래의 점심상 위에 크고 느린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리고……,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뒤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분 걸어도 안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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