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진화 시인 / 포란(抱卵)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8. 11:17

최진화 시인 / 포란(抱卵)

 

 

지나간 순간의 고통은

쉽게 잊혀져갔다

절벽을 치고 나간 파도처럼

 

물거품 속에서

겨우 살아난 새는 자신이 한 때 껍질 속에 갇혀 있었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부리가 붉은 새는자신이 한 때누군가의 물고기를 낚아챘었다고,

 

성긴 깃털마저 남루해진 새는이제 짧은 비행 앞에서도까마득해지는 비굴함을고백하지 못했다깨어나지 못하는 알을품고 앉은 그 새는

 

 


 

 

최진화 시인 / 초승달에 걸린 수레

 

 

방금 119 구급차가 떠나고 국립중앙도서관 하늘 위에

깨어진 안경 하나 걸렸습니다

 

열람실 책상 위로 아침햇살 빗기면 언제나 그 자리

단아한 감색 셔츠의 당신이 여름날 나팔꽃처럼

몸을 웅크린 채 책 냄새를 맡고 계셨지요

어느 오후에는 진 무른 눈가를 닦으시더니

바람이 빗방울 때리는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기도 하셨습니다

도스도옙스키, 톨스토이, 파스퇴르나크, 고골리

몇 날을 러시아 광막한 벌판에서 눈을 맞고 계셨지요

몸속으로 걸어 들어온 문장들이 환호성을 지르면

촉이 단 만년필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씨앗을 심 듯 필사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날 당신은 눈 덮인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걷고 계셨지요

희디 흰 나무껍질 위에 남기고 싶은 문장을 새기느라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가요

 

구급차가 사라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초승달 사이로 안경은 사라지고

무거워서 더는 가지 못하는

당신의 책 수레만 오래도록 걸려있습니다


 

최진화 시인 / 새벽길

 

 

어제

밤 새 눈 내리느라

내 눈에 눈물이 내렸나보다.

 

이렇게 추운 날

나보다 더 추운 누군가가

시린 발을 오그리고 새벽을 걸어갔구나.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가며

고백하지 못한 죄를 부끄럽게 덮는다.

 

달이 떠나가지 못하고

얼어붙은 서쪽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최진화 시인 / 갯메꽃

수천 번 수만 번 뒤척이던 저 낯익은 소리가

오늘은 비명으로 쏟아진다

들이치는 해풍에 살아남으려

낮은 포복으로 모래땅을 기던 밤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라고

떠지지 않는 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오랫동안 섬과 섬을 돌아

상처 난 발을 절룩이며 왔을 때

한쪽 마음을 도려내어 그늘을 내주었다

그늘 안에서도 당신은 앉지 못하고

자꾸 쓰러지는 햇빛 속으로 뛰쳐나갔다

내 몸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당신에게 꽃잎이라도 덮어주고 싶었다

달빛도 다시 태어날 것 같은 사월의 밤

내 뿌리까지 당신이 스며들었다

읽지 못한 유서 한 장 봄 바다로 떠간다

-계간 『문학나무』 2011년 가을호 발표

 

 


 

 

최진화 시인 / 완창(完唱)

 

 

내 목울대를 쥐고 있는 새가 있었다

부채를 쥐고 있는 동안 눈물이 고였다

아무도 그립지 않았다

내 몸을 떠나올 너만 그리웠다

부채를 펼쳐든 순간 새의 부리가 목젖을 쪼았다

창이 온통 붉은 노을로 아팠다

날개를 퍼덕이던 새

저녁 속으로 날아올랐다

너는 그렇게 내 속에서 나와

나를 노래하게 했다

 

 


 

 

최진화 시인 / 아이들은 옆으로 자란다

 

 

혼자 놀기에 익숙한 아이들

쥐 한 마리 잡아 살포시 검지로 누른다

눈알이 붉게 반짝이는 이 쥐를 만질 줄 알게 되면

큰물이 둑을 부수고 들판을 덮어버리 듯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커지기 시작한다.

술래잡기,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친구와의 주먹다짐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수장된다

 

쥐들이 데려간 세상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폭탄을 던지며,

누군가 흘리는 피를 무심히 바라본다.

쓰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앞니가 가려운 아이들이 갉아댄다

반짝이던 눈알은 점점 붉게 물들고

몸은 허연 기름띠가 줄무늬를 그린다

 

오늘 아침도

밤새 싸우고 일어난 살 찐 회색 쥐들이

줄지어 학교를 가긴 간다

 

 


 

최진화 시인

경기도 동두천에서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2005년 계간 《문학나무》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푸른 사과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