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리 시인 / 환(幻) 외 5편
|
조유리 시인 / 환(幻)
시누대에 끓고 있는 곡(哭)으로 바람은 환생을 꿈꾸지 사람으로 태어나 바람으로 죽는 일은 흔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죽은 아버지, 극적인 후생설을 믿으셨어요? 수음만으로도 태기가 슬어 나는 아비 없는 자식들을 내질렀다 펄럭이는 플레어스커트 밑단에 랭보의 서시(序詩)를 자빠뜨려 놓고 술을 먹인다든지 도무지 취하지 않는 고독을 통속적인 연애로 빳빳하게 다려 지갑에 넣고 다니기도 하였던 것인데, 소용되지 않는 지전처럼
내게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귀두로 벌떡벌떡 발기하는 문장도 있었지만 태반에서 누룽지처럼 긁어져 시궁쥐 밥이 된 조사들도 많았다 적출물들을 내세에서 피우다 만 궐련에 말아 비벼 끄는 동안
삼천 밤쯤 자고 깨어나면 아버지, 이 가계의 구업(口業)을 시퍼렇게 여의시겠어요?
조유리 시인 / 지난 밤 세 편의 영화를 찍었다
동시상영 극장에서 세 편의 영화를 찍었지 공포와 멜로와 판타지
큐, 사인이 떨어지자 필름 한 통 속에서 내가 태어났어 시차를 분간할 수 없는 장르에 두 발목이 팔랑 공중에 들어 올려 졌지 감독도 관객도 없는 1인 3역, 다행히 얼굴 없는 애인이 옆에 앉아 힐끔거려주었어 나도 눈 코 입을 버린 채 대사를 던졌지
젠장, 이번 생은 초장부터 커트 당한 청춘의 리허설이래
몇 모금의 담배연기가 딴 생각으로 흩어지고 - (암전) 한 개의 빨대로 머리카락이 긴 미망과 콜라를 나눠 마시는 동안 입가에서 실패한 연애가 흘러내렸지 - (암전) 입술을 문지르는 사이 빠른 화면 속, 짧은 사랑을 비벼 끈 애인 버전으로 재떨이가 수북한데
이 장면이 진짜 클라이맥스라고?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눈 뜬 새벽 자막에 오줌을 갈기는 씬~ 에서 하룻밤 새 분장을 지우는 시나리오
나는 대체 어느 대목에서 혀를 꺼내 문 채 종영된 거지?
조유리 시인 / 슬픈 귀환
우리는 오늘 흰 서랍장 가장 안쪽에 개어놓은 스웨터들입니다 처음부터 눈 코 입이 없었습니다 지뢰였는지 전술이었는지 어뢰였는지 전략이었는지
등짝의 보푸라기가 등 너머 살갗을 향해 칸을 갈아타려는 순간 우리는 침목의 차디찬 모퉁이를 도는 망치질 소리를 잠깐 연민합니다 망치질 소리에 망치가 부서질 리 없지만 그것을 내리칠 때 번뜩이던 쇳날이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게 했을 거라는 생각
부딪친 이빨끼리 충돌하면서 스쳐 지나온 역사들은 불룩한 의혹의 포댓자루가 되었습니다 절반은 목격자고 절반은 용의자인
누군가는 그 사이 지나가는 새떼들에게 명령을 내려 의혹을 유출시키고 새들이 진술한 깃털 수만큼 데마고기 새 판을 게워낼 때
우리에게 보고된 겨울은 대답할 의무를 상실했습니다 조준된 살생부에 인장을 찍고 다음 생으로 전역할 것
이 시대를 복무한 마지막 임무였으니까요
조유리 시인 / 쇄골 위에 단애를 세워두고
씻김굿 하는 저 꽃 죽은 꽃잎들이 산 이름을 부르는구나 우리 오래전 태어나 살빛을 익혔지 핏내 빚어 화전을 부쳤지
너에게서 흘러나온 표정이 내 입술에서 피어날 때 두근거리는 맥박이 허공에도 맺혔지 바람 부는 방향대로 무작정 휘었지 입꼬리의 흰빛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낮밤 없이 분분할 때
죽은 사향나비의 체액 입김을 후 불 때마다 세상 모든 꽃에서 사람의 냄새가 풍겼지 사람도 꽃으로 살다 간다며 피고 지는 때
쇄골 위에 단애(斷崖)를 세워두고
여기서부터 우리 다른 세상 얼굴이 되자 눈코입 벗어버리고 가장 연한 살로만 수의를 입은 눈으로 만져보면 부드럽게 천지 깜깜해도 무섭거나 흉하지 않게 성성한 죽음의 안감이 되어
초사흘 달을 지르는 작두날이 붉구나 몸 바꾸는 피 조용해진다, 저 산딸꽃
조유리 시인 / 천정(天井)*
마른벼락을 맞았다 부서지고 뽑히고 비틀린 사지 어디도 성한 곳 없다 검은 재로 빚은 압정에 꽂혀 북향으로 난 창에 표적처럼 내걸린 심방 어떤 시공간은 그렇게 태어난다
고립도 재난의 한 형태라면 우리가 앓는 길이와 폭에 대하여 더할 말이 없다
사교적인 당신은 팔이 길다 깊은지 얕은지 못이기는 척 덩달아 흘러야 하는지 어떤 물살을 숭배해야 말단직이라도 투망에 걸려드는지 손마디를 꺾어가며 탐문하고 어렵지 않게 지필묵이라도 한 건 챙긴다 연대하여 놀랍도록 엉기는 고수들 어제의 관행에 참이슬을 따라 마시며 도처에 누각을 짓고 성명서에 지장을 찍는다 돌돌 말려 소용돌이치는 악천후의 역사서
좀체 내뻗을 곳 없는 팔이 욱신거릴 때마다 안으로 접어 주무를 때 움푹 짚이는 수곡(水谷)이 있다
물 대신 피가 부릅떠 있는 팔꿈치 저 뼛속 속속들이
*천정(天井)-팔꿈치 후방 뼈의 움푹 들어간 곳에 우물(井)같은 모양의 경혈점.
조유리 시인 / 흰 새가 붉은 지느러미를 갈아입을 무렵
비려, 그런 저녁은 요일마다 색깔이 다른 월력을 생피로 괴어놓고
저녁마다 제 뼈를 오므린 바람이 여자의 내륙을 샅샅이 돌아다녔다는데 내 여자만 아는 여자들의 사생활이 한 번도 입지 않은 속옷을 개키며 홍해를 건넜지 대엿새쯤 꼬박 붉은 지느러미 듣는 동안 가 랑이 사이 일들이 종교가 되고 혁명이 되고 사랑이 되었다는
지평 끝에 널어 둔 계절이 마르면서 얼면서 서랍을 열었다 닫으면서 내 여자의 살도 낡은 비유가 되어 갔지만
들끓는 체위의 맨 처음 피 묻은 고독을 배란하는 저 여자
내 여자만 아는 늙은 엄마의 일몰 무렵이지, 여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