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숙 시인(화순) / 흔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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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숙 시인(화순) / 흔적
초부면 마현리 여유당(與猶堂) 낙숫물 자리에
가벼운 흙모래는 다 흘러가고 굵은 모래만 태산이다
수없이 캐묻고 두드린 흔적이다
김종숙 시인(화순) / 폭포에서
인적 끊긴 산중인데 물길 닿는 소리 한결 같다 이역만리 밖 이상적이 탱자울 궁벽한 추사를 좇는 우도(友道)의 물길, 이 같다 하였던가
아직 산문 밖에서는 훼절의 소식 멈추지 않는데 저 기운찬 물살은 어느 심연에 물꼬가 닿아 이리 당당하고 촉촉한가
-시집 <동백꽃 편지>, 푸른사상, 2017
김종숙 시인(화순) / 동사의 말
해안가 정자에 나와 책을 펼쳐 읽는데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 저 낱장의 바다가 일으켜 세운 주름을 볼 일이지 글자들 볼 일이 아니다 저 수없는 주름의 역사를 볼 일이지 몇 줄의 언어로 일해놓은 재현을 볼 일이 아니다 재현은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선 거짓말이기 일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리려 바다는 있다. 거기 동사로 있다
-《사람의 깊이》 2023, 26호
김종숙 시인(화순) / 별서
능수버들의 문장에 녹우(綠雨)가 흐르네, 문장은 나를 멈춰 서게도 정토를 기웃거리게도 하네
그의 시문(詩文)을 들여다보는 사이에도 문장은 쉼 없이 돋아나고 나는 돌계단에 앉아 귀를 기대네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녹우여 그윽한 문장이여 유려한 필체여
오늘은 저 빗줄기 속에 돋아나는 말을 따라가 보기로 하네
푸른 사유의 관정을 기웃거리네
김종숙 시인(화순) / 민주의 나무
제주 아끈다랑쉬 오름에 나홀로 나무 한 그루 있지 사철 홀로 푸른 나무, 그러나 너는 외롭지 않다 바람에 맞서 세 손가락으로 너를 수호하는 억새들의 부드러운 손과 단단한 뿌리가 너를 지킨다 민주주의 민주주의 데모크라시 데모크라시를 외치며 촛불을 치켜든 미얀마 미얀마가 너를 지킨다
햇살은 투명했으나 계엄군의 곤봉과 총탄은 시민에게로 향했다 태아도 어른 아이도 없이 모두 핏빛으로 낙하해 갔다, 오월이었다. 친구여, 우리 그대 위해 안민가를 합창하리니 피 흘려 지킨 민주의 나무 광주에서 양곤까지 밀고 나아가리니 울지 마오, 미얀마, 그대 위해 노래하리니
저기 떠도는 구름을 보오, 민주의 딸 민주의 아들들이 앞서 가며 새긴 말 다 잘 될 거야 Everything Will be OK 민주의 나무 향해 돌진하는 톱날을 막아서며 우리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처럼 신념의 나무를 심는 그대여 흰 장미의 은유를, 촛불 하나의 힘을 믿어요
피로 역사를 세우려는 마성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대여, 피의 냄새를 흠향하는 자의 침묵을 기억해요 악마는 심장을 꽃 뒤에 숨겨놓는다는 것을 기억해요 끝내 저 정치꾼들의 도구는 되지 말아요
환한 아픔 위에 봄을 써가요
김종숙 시인(화순) / 사물들
중심을 잃고 오래 누운 날은 사물들만 오래 곁을 지켰다 보행보조기와 전기침 시계와 달력 유리창의 먼지............ 모든 원형질의 뿌리는 절박함이다 이때 우리는 바랑을 지고 탁발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남겨진 배추김치 겉잎 한 장을 펼쳐 나무 그늘이라 찾아들고 병실로 포행 온 해 그림자에서 물결을 만날 것이며 병상의 누워 태백의 황지연못을 돌고 돌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달력에 걸린 풍경 속을 걸어 들어 내가 풍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수천 가닥의 침이 내리 꽂히는 날 백담계곡 영실천 무극의 천 탑을 내게 왔다 갔더란 말인가
지독한 바람 앞에서는 사물들도 마음을 보태 현(玄)의 시간을 같이 건너 주더라
김종숙 시인(화순) / 전부(田夫)
바닷가 청보리 언덕에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자 비설거지를 마친 노인과 늙은 아내가 소달구지를 끌고 집으로 가기 바쁜데 황소는 잇꽃을 따라 남의 밭으로 들겠다 고집을 부린다
늙은 소는 달구지가 힘에 부치고 태산을 갈아엎던 노인은 황소가 힘에 부치는가 달구지를 세우고 먼 산 해를 본다
외길 건너 풍경을 바라보던 내가 오히려 다급해져 달구지 뒤축 슬쩍 들어주었더니 황소도 노인도 가던 길 쉬 간다
양철 지붕의 헛간을 둔 노인이 그제야 해를 풀어준다
-시집『동백꽃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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