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종빈 시인 / 밀밭에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8. 11:29

박종빈 시인 / 밀밭에서

 

 

까마귀를 보면

나는 언제나 손보다는

날개가 있었으면 했다

 

황금빛으로 지저귀며

밀밭 위를 비상하는 검은 눈동자

출렁이는 저녁의 비상은 불안하다

 

울음과 노래 사이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기도 하지만

 

까마귀 나는 밀밭을 보며

길이 끝나는 곳까지 나는

가고 싶었다

 

-시집 <물을 쓰고 불을 읽고>에서

 

 


 

 

박종빈 시인 / 모차르트의 변명·2

 

 

빛이 빚처럼 몰려들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발자국 소리에 사소하게 놀라는

버려진 음표들, 겨울 숲으로

내 미망의 산책은 시작되었다

빛이 빗질 잘된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찰랑거리는 동안

빛과 음표의 빗,

빛과 음표의 빚,

겨울 숲 그 한복판에 놓아준다

모든 언어가 그 소리를 찾아 빛날 때까지

마저 버리리라

툭, 햇살 부러지는 소리에

숲의 눈처럼

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박종빈 시인 / 모차르트의 변명·5

 

 

틀림없이 누군가가 독을 먹였다*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는구나

너는

믿음직한 시종처럼, 그러나

검은 옷의 레퀴엠 의뢰인처럼

정체를 알 수 없구나

 

클라리넷 협주곡과 프리메이슨 칸타타가

몸속에 퍼져나갈 때

끝낼 수 없는 음악이

뜨거움으로 눈물이 되는구나

 

너의 존재를 잊고 있었구나

나의 유일한 친구

치명적인 독이여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필살기로

너는 기다려 주는구나

 

나는 지금

틀림없이 시간에게 중독되어 가는구나

 

* “Gewiss-man hat mir Gift gegeben"은 모차르트의 독살설의 근거로 자주 인용이 되는 구절로 모차르트가 1791년 10월 중순경 모차르트가 아내 콘스탄체에게 한 말이라고 함.


 

박종빈 시인 / 강

 

 

사람들은 누구나 강을 갖고 있지

마음속의 흐느낌을

갈대의 휘파람을 간직하며

어둠 속에서

혼자만의 언어로

얘기하고 있지

 

마을의 잠 속으로

유년의 안개는 내리고

모두들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는 하구의 강이여

날개를 접은 강물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물이 되어 흐르듯

기나긴 울음을 간직한 채

철새들의 흰 깃털 사이사이

하늘을 품고 있지

 

강안에 누워있는 목선과

조개껍질, 게들이 파 놓은

무너진 구멍 위로

바다가 강이 되어

밀물과 썰물로 흐르고

별들이 나침반처럼 빛나고 있지

계절이 하나씩

물러가 쉬는 곳마다

강물은 또 별빛처럼 반짝이고

 

사람들은 누구나 강을 갖고 있지

달빛과 바람의 화음을,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강둑과

강둑에 새로 핀

들꽃의 향기를 간직하며

바다로만 묵묵히 흐르고 있지

 

-<등단작>

 

 


 

 

박종빈 시인 / 새의 이름으로 한 마디

 

 

닭장의

그물망을 넘나들며

먹이를 훔쳐 먹지만

주인은 없다

 

집도 없지만

주인도 없는

 

뼛속까지 비워

날개도 자유롭지만

죽음도 자유롭게 상상하며

비약하는

 

참새의 한 마디

짹!

 

 


 

 

박종빈 시인 / 눈, 폭설

 

 

용서하라

용서하라고

눈이 내린다

 

사랑한다는 거짓말과

미워한다는 서로의 진심까지도

펑펑 웃으며 내리는 눈은

하나씩 하나씩

지상의 것들을 접수하여

낮은 곳으로 가고 있다

 

아집이 되어버린 원칙들

버리라 버리라

눈이 내리고

순교자의 피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죄를 덮듯

또 눈이 내린다

 

잠시 눈은 눈 속에 파묻혀

따스한 꿈을 꾸기라도 하는 것일까

반짝이기까지 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눈 위에 눈이 내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용서하라

용서하라고

눈이 내린다

 

 


 

 

박종빈 시인 / 황무지에 내리는 눈

 

 

 절망보다 깊게 욕설보다 가볍게 내리는 눈, 눈은 그렇게 지난 계절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사람들이 지나왔던 길의 기억들을 더듬는다, 라디오 · 신문 · 텔레비젼의 악성 루머와 진성 루머의 텅 빈 거리들, <이 도시는 손바닥이야> 역전에서 시청까지 붐비는 사람들, 파이오니어·에포크 ·랭카스터 ·블랙 조 ·빌리지 ·블랙 박스 ·아가페 ·은모래 ·검은 돗배 ·배 ·배 “바이 바이”하며 어디든 잠시 거치다 헤어지는 귀가 길, 록큰롤 반주와 영화의 액션에 생기 넘치는 거리들을.

 

 언제나 영화는 지나치게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지만 입회자 없이 검증은 끝나고 서둘러 눈발 뒤로 사라지는 어깨들, 유난히 크고 성긴 그대의 어깨는 지쳐있구나, 지쳐있었구나. 눈을 뜨는 네온싸인이여 도시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잔해여 눈이 내리지 아니한가, 진절머리 나는 생각으로 몸을 떨듯 깜박이는 빌딩의 불빛 사이에도, 썩어가면서도 흐르는 강물 그 어느 다리 밑에도, “잊으라” “잊으라” 함구의 묵주들이 길마다 찍히는 본정통 ·먹자통 ·유락통, 그 어느 거리에도 밤을 적시며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들의 시가 한 시대를 얘기해주지 못할 때, 불빛 속에서 도시는어둠 쪽으로만 성장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조금씩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을 때, 저렇게 내리는 눈은 누구의 목숨인가, 절망보다 깊게 욕설보다 가볍게 내리는 눈, 그렇게 마지막처럼 첫눈이 내린다.

 

 


 

박종빈 시인

196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 화학과 졸업. 대전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1993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4년 계간 『시와 상상』으로 시작활동 재개, 시집 『모차르트의 변명』 『물을 쓰고 불을 읽고』 『오래도록 사랑은』. 2005년 『시와 상상』작품상 수상, 2017년 백지 시문학상 수상. 현재 <시와 경계> 기획위원, 큰시동인, 대전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