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식 시인(무안) / 서릿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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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시인(무안) / 서릿발
쏟아붓는다 저 차가운 별빛 백운산 기슭 매화는 별빛에 잠겨 물새처럼 자맥질한다 소소리바람이 망덕포구 소식 매화 가지에 띄워 보낸다 꽃망울 핥고 섬진강 건너 지리산 천황봉 잔설 만날 때쯤 가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리 허벅지게 꽃망울 터지듯 마음 한 켠에도 꽃송이 피어나리 숱한 자맥질 끝에 도달한 어느 별처럼 차가운 생의 길가에 하얀 눈물 남겨 두리.
조성식 시인(무안) / 다랭이논
어머니는 이마에 다랭이논 대여섯 마지기나 버시고 계셨다 나는 그 다랭이논에서 보리며 벼를 먹고 컸다
그곳도 처음엔 보리와 벼가 자랄 수 없는 버려진 잡초들로 가득했으리 삶에 파이고 세월에 깎이면서 다랭이논이 산비탈에 만들었을 터
반달같이 누워 계신 어머니 병실에 봄 햇살 한 광주리 찾아와 다랭이논에 부려 놓고 간다
조성식 시인(무안) / 북경원
조대 정문 사거리 골목길에 중국식당 하나, 붉은 명찰 새긴 ‘북경원’이란 은색 철가방을 뒷좌석과 양 옆에 하나씩 매단 오토바이는 여주인을 등에 태우고 병원을 제집인 듯 들락거렸다. 오토바이는 주차장 한 칸 버티고 앉아 충견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땅솔 같은 키, 파마기 없는 부시시한 머리, 화장기 없는 거무스름한 낯빛, 새살 돋은 옹이 박힌 손, 바지만 즐겨 입는 선머슴 같은 여주인은 1층부터 9층까지 병원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쓸어내며 쩌렁쩌렁한 인사말로 짜장과 짬뽕의 도착을 알렸다.
벚꽃 가지 휘어지는 봄, 매미들이 땡볕 달구는 여름, 단풍잎 사이로 밤 톡톡 내려놓는 가을, 구들장 속 장작불꽃 끌어당기는 겨울을 병원의 한 구석에서 보내는 동안 탕수육을 시키면 짜장면 곱빼기에 만두까지 가져오는 그녀를 무던히도 사랑하였다.
그녀는 김순자라는 이름 대신 북경원이라고 불렀다.
조성식 시인(무안) / 올무와 올무 사이
숲속 오솔길 한 모퉁이 지나 가시덤불 속 하얀 나비 한 마리,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한참 동안 몸부림치다 살겠다는 끈 놓았을까. 날갯짓에 바람이 들지 않는다. 그 정지의 시간을 어디서 노려보고 있었을까? 민첩하게 나타난 거미는 만찬이라도 준비하려는 듯 나비의 몸을 거미줄로 치-잉 칭 동여맨다.
대부업체에 걸려든 정씨가 벗어나려고 파닥거리던 안타까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정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서 피를 빨리고나 있지 않을까. 나비의 눈물이 하얗게 걸려있는 거미줄이 길을 막는다.
수많은 올무와 올무 사이를 피해 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조성식 시인(무안) / 따뜻한 등불 하나
먹이를 찾아 지구 한 바퀴 돌아야 하는 머나먼 여행길, 줄지어 떠나는 기러기 떼
서로 위로하며 바람과 맞서 앞서 날다가 지치면 뒤 따라온 기러기가 바통 넘겨받아 앞으로 나아간다
밤을 지나고 구름을 지나고 안갯 속을 지날 때마다 끼륵끼륵 끊임없이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서로의 마음을 토닥이며 맨 앞서 날고 있는 기러기에게 보내는 응원의 노래 이리
나도 한 마리 기러기가 되어 함께 날다가 더 이상 앞으로 날 수 없어 땅으로 내려앉은 기러기 곁에서 따뜻한 등불 하나 켜고 싶다
조성식 시인(무안) / 가련봉까지는 가야 한다
두륜산 만일재에 올라서니 일행의 발길 막고 섰던 억새들이 백기를 흔든다
두륜봉의 기세를 등에 업고 가련봉을 향해 오르던 한 사람이 솟대처럼 솟은 절벽 위에 서서 가련봉과 노승봉을 가리키며 여기서 되돌아가자 한다
말들이 갈팡질팡 오가는 사이 나는 가련봉까지는 가야 한다며 앞장섰다 가련봉과 노승봉이 나의 외침을 들었는지 무서워 말고 오라 한다 멈추지 말고 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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