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임 시인 / 초록 플러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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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임 시인 / 초록 플러그 잡히는 것 없고 돌아 나온 발자국 본적 없는데, 날아든 곳마다 날개가 직조되는 눈 깜짝할 새야, 지난봄 배꽃이 지며 던진 표정을 나는 생각하네 나를 다녀간 배꽃이 비밀통로일지도 몰라, 눈 깜짝할 새에 통과해야 할 비밀통로
잡히는 것 없고 돌아 나온 발자국은 없는데 하룻밤 사이 자꾸만 솟아나는 욕구의 봉우리들 이 별을 떠도는 과객은 제가 세운 봉우리를 오르다 지친 초록들이라고, 오르고픈 욕망에 빌미를 잡혀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이라고, 무심한 듯 노동을 끝낸 배꽃이 던진 표정을 생각하네
잡히는 것 없고 돌아 나온 발자국은 없는데 팔당댐 수문 앞, 노란 플라스틱 의자며 천사의 깃털보다 더 보드러운 여러 종의 비닐들, 무구한 영속을 꿈꾸며 부유물로 떠도네 안팎으로 썩지 못하는 난지도 같은 지상 위로 백로 한 마리 내 동공을 빠져나와 유유히 날아가네 하늘을 접었다 펼치며 허파 속으로 날아드네
수련 향기를 흠뻑 뒤집어쓴 은빛 보름달이 살찐 내 검지손가락을 다 갉아 먹고 토끼섬 위로 떠오르네 지친 누군가 또 지상으로부터 눈 깜짝할 새를 통과한 거라고, 강가를 두른 부레옥잠 보랏꽃무리가 초록 플러그를 뽑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중이라고,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허영청휘영청 은빛으로 희롱하는 보름달 따라, 나 한없이 달뜬 보름달 되어 비밀통로를 통과하고 싶네 지친 노동을 내려놓고 떠오른 것들 겹겹 별이 되는, 붙박이별들의 푸른 천정이 되고 싶네 무심한 듯 그렇게 환한 배꽃을 통과하고 싶네
이성임 시인 / 어느 몽상가의 푸른 침묵
네 번의 탈피를 막 끝낸 누에가 채반 위에서 꼼질거린다 사각사각 한 수레의 뽕잎을, 초록을, 사각을 먹어 치운다 가랑비 소리를 토해 낸다 하루가 다르게 몸을 키워내는 저 몽상가, 알에서 깨어나던 때보다 몇 십 배 키운 몸집,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구멍투성이 앙상한 뽕잎의 길 누에의 몸으로 옮겨 앉은 한 수레의 초록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텅 비운 하루는 투명으로 충분하다 입을 뻥긋 거릴 때마다 환몽의 악보처럼 뽑아낸 한 가닥 말 한 채의 집이 되었다 선정 삼매에 들 터이다 몽상가의 푸르고 견고한 침묵 앞에 후욱- 발끝에서 끌어올린 내 심호흡 무채색 투망을 친다
이성임 시인 / 누수의 형식들
구름 사이 누수된 빛무리를 달이 어쩌지 못하는 저녁
갓 구운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 깔조네를 먹기 좋게 잘라주는 동안, 피식피식 빠져나가는 발목을 감춘 발효의 시간들
먹물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면 입술 사이를 벗어난, 가보지 못한 길모퉁이 같은 미끄러진 면 두어 가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져나간 민망한 웃음 뒤 먹물이 점령한 입속은 갈라파고스 해변
덜어내지 않아도 침묵이 되는, 그 단단함을 가끔은 풀어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이성임 시인 / 너의 자궁을 빌릴께 비로소 봄이 핀다 꽃의 자궁을 빌려 봄은 또 온다
썼다가 지우며 천년을 쌓아 계절을 통과하는 꽃들의 멀고 먼 순례길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겨울을 지나 가녀린 봄을 밀어 올리며 꽃은 핀다
밤이면 별의 좌표를 읽고 마지막 바닥을 치는 흔들림으로 꽃은 봄을 불러들이고
봄까치꽃 자궁을 빌려 봄은 또 그렇게 온다
-《시인정신》 2022년 여름호
이성임 시인 / 별을 팝니다
저리 쉽게 별을 구워낼 수 있다니 문방구 앞 달고나 장사 세상,연고라고는 엉덩이 붙여놓은 자리뿐인 여자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 끌어안고 온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 설탕 한 스푼,소다 찔끔 섞어 잘 저으면 양은 국자 안에서 흠실흠실 몸을 바꾸는 여자의 꿈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별 하나씩 쥐고 쪼그리고 앉아 꿈을 빚는 꼬마 녀석들 비집고 앉아 바늘 끝에 침을 살살 발라 계곡을 따라가면 알퐁스 도데의 별 하늘이 열리고 은하철도999가 달린다 별을 다듬는 사이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여자의 머리 위로 일제히 쏟아지는 미리내 양 떼 식어버린 별을 앞에 놓고 그녀가 졸고 있다
-시집 『나무가 몸을 열다』 2022. 현대시학시인선
이성임 시인 / 주름을 모으는 손
굽은다리 지하철역 통로 끝에 더덕 향 펼쳐놓은 노파 종일 웅크리고 앉아 더덕을 손질하고 있다 더덕껍질보다 더 주름진 손등 펼치면 깊게 패인 비포장 도로 금세 지리산 시루봉이 일어설 것 같다 탁, 탁 칼끝으로 긁고 있는 삶의 터전 어느새 뭉뚝하게 닳아버린 손톱 밑에 더덕뿌리가 거친 숨 몰아쉰다 푸른 지폐 한 장 건네자 고향 몇 뿌리가 내게 건너온다 손에 잡히는 더덕의 살집이 도톰하다 온몸 비틀어 넘은 시간들 노파의 손에 주름을 넘겨준 하얀 뿌리에서 제법 알밴 티가 난다
내 손끝에서도 무지렁이 향기가 스며 알싸하다
이성임 시인 / 클립 속의 여자
기억을 꽉 물고 있는 여자 한번 물었던 기억을 다시는 놓지 않는 여자 얼마나 오랫동안 악물고 있었던지 부스러질 것같이 응고된 기억들 이빨자국에 벌겋게 녹물이 묻어난다 놓고 싶어도 풀지 못하는 절망의 자물쇠 녹슨 기억의 뼈와 살을 깎아 날지 못할 꿈의 종이 새를 날리는 여자 어떤 속도의 불화살도 꽉 물린 그녀 안에선 꿈쩍할 수 없다 일출과 일몰의 간극사이 시작과 끝을 두고 물려 있는 직립의 밤, 아우성치는 기억의 골목을 돌아 닫힌 문들을 지나, 붉은 시장기를 지나 여자는 광고 문구에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운다 여자는 하이힐 높이를 몸 안에 가두어 키운다 안으로 끌어들인 길이 좁고 가파를수록 점점 더 이빨에 힘을 가하는 클립 속 비만, 여자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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