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하 시인 / 명랑 레시피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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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하 시인 / 명랑 레시피
어지럼증이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계절입니다 두통의 크기를 기계음이 늘였다 줄였다 재어 보네요
약봉지를 톡톡 치면 안개처럼 하얀 가루가 피어올랐습니다 두통의 레시피로 명랑을 저장해 놓은 엄마 뽀얗게 옥양목 홑이불을 빨아 널었을 때도 눈부신 햇살 아래 어지럼증이 우르르 천둥 칠 때도 숯검댕이 부엌 천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 급히 삼키다 앞치마에 하얗게 흩어놓기도 했던 명랑
시커먼 아궁이에 쇠젓가락을 휘저어 꾹꾹 속내를 눌러놓았던, 명랑을 보장하던 약봉지는 빗어 내리지 못한 머리칼처럼 부스스 쌓여만 갔지요
낮달을 빌려 쓴 엄마의 얼굴에 명랑의 물결이 잠깐 반짝이다 이내 사라지곤 했는데
그래도 엄마의 화양연화는 명랑을 빼놓고는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고 꿀꺽 삼키던 흰 가루를 나도 종종 슬쩍 찍어 먹곤 했는데요 명랑이 쌓여 나는 지금 명랑이라는 연작 드라마를 이어가야 하는데요 언젠가부터 약국에는 명랑이 일체 품절이더군요
기댈 데라고는 명랑 뿐이었던 엄마 하지만 결코 명랑해지지 않던, 단단하기만 했던 두통의 안부가 궁금해져요
오늘, 나의 어지러운 두통은 더욱더 자라납니다 그리워져 아득해지는 명랑 저장된 엄마의 레시피가 내 머릿속에 끝끝내 흐르고 있습니다
계간 『열린시학』 2022년 여름호 발표
황남하 시인 / 사라지는 그대는 새로운 정원이 된다
몇 겹인지 모를 꽃잎이 그대의 마지막 숨을 덮고 있다 병동의 기록들을 잠시 펼쳐놓았다가 접는 꽃송이 꺾인 꽃대 끝에서 말라가던 이력이 둥근 지붕 위에 씨앗을 떨군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과 목울대에서 빠져나온 마지막 말은 느닷없이 아픈 꽃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가지런히 뼈로 누운 그대 무심한 듯 소음의 둘레를 외면하겠지만 둘레에는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귄다 가끔 산책자들이 지나가고 꿇은 무릎에서 여린 꽃대궁 밀어 올린다 슬하엔 새로운 정원이 탄생하고 별서에 든 꽃들의 누추한 한뎃잠이 먼 곳을 향해 기대고 있다
계간 『열린시학』 2022년 여름호 발표
황남하 시인 / 꽃에 대한 經
줄지어 누운 봉분들 옆 조화들이 이웃이다 주소지를 옮겨온 꽃들은 산비탈 봉분 주변이 낯설지 않다 슬픔에 젖은 생화들이 그렁그렁 터지는 눈물 견디지 못할 때 며칠 못 가 사색이 되어 자진 할 때 마음 베일 일도 그리움이 고일 일도 없는 조화들은 다발다발 꽂혀 철심으로 조문한다 싱싱한 꽃대 밀어 올리지는 못하지만 표정만큼은 환하여 울긋불긋 죽은 자의 대미를 장식해준다 공원묘지에서는 팡팡 봉오리 터지는 꽃들만이 꽃이 아니다 죽은 자의 위로가 돼주는 것들이 꽃이다
황남하 시인 / 배롱꽃이 웃는 이유
태양은 구름을 한 점 한 점 떼어내 뜨겁고 붉은 꽃을 피운다 뭉게뭉게 솜사탕 같은 꽃잎을 매단다 그늘은 도대체 다 어디서 낮잠을 자는 걸까 배롱꽃이 팝콘처럼 터지면 수다스런 웃음소리라도 귓속에 꽉꽉 채워놔야지 여름의 이빨 사이로 배롱꽃 메롱 혀를 내밀 때 나도 저 백일홍 밑에서 뚝뚝 여름을 따서 던져볼까 오! 해변을 달리는 싱그러운 소녀들의 머리칼처럼 여름을 달려볼까 뜨거운 한낮 배롱꽃 흐드러진 웃음 사이로 여름 한복판이 스윽 지나간다
황남하 시인 / 시 한 보시기 앞에서
장마가 온다니 김치 한 번 담가보자구요 싱싱한 배추 이념처럼 시퍼런 이파리 뚝뚝 떼어내고 짜디짠 소금물에 한나절쯤 켜켜이 절이다 보면 푸르르 살아있던 성깔도 한풀 꺾이기 마련인데 (그래도 한 가닥 꿈까지 절이진 마세요) 눈물 콧물 재채기까지 쏙쏙 빠지는 맵싸한 양념들이 속속들이 파고들면 제 속을 꾹꾹 다독이며 오히려 한없이 깊어질 줄도 아는데 (이런 고통의 시간을 거치는 건 필수겠죠 생도 원래 눈물 나도록 매울 때가 있으니)
그제서야 달콤한 맛에 칼컬한 언어들이 탄생하는데 톡 쏘는 그 맛으로 잘 숙성된 김치 한 보시기 버무리다 보면 푸릇푸릇했던 겉치레도 벗겨지고 잘 발효되는 (자아, 어때요? 잘 발효됐나 모르겠네요) 시 한 보시기
-2016년 ≪문학나무≫ 신인상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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