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시인 / 풀잎 외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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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 시인 / 풀잎
병 조각이 깨져 발을 상하게 하는 길은 들꽃이 별처럼 펼쳐져 있기도 했어요 우박이 떨어지기도 했지요 작은 우산이 찢어져 물이 새고 온몸을 축축이 적셨어요 나는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발견하곤 얼른 그곳으로 도망쳤어요 숲이 우거진 곳에 커다란 우산이 놓여 있었지요 우산을 슬그머니 잡고 걸었어요 걷다 보니 구불구불하고 캄캄한 숲을 헤매고 있었어요 사나운 짐승의 포효가 들려와 눈을 크게 떠봐도 앞이 보이지 않았지요 커다란 바위랑 가시나무가 막아서고 있었어요 우산을 펼치자 커다란 우산은 갑자기 저 멀리 달아나는 거예요 비에 흠뻑 젖어 헝클어진 나는 젖은 몸을 말리며 엉금엉금 기어갔어요 살이 쭉 빠진 멸치처럼 두리번거리며 우산을 찾았어요 우산은 낡고 힘이 없었지만 버려둔 그 자리에 얌전히 있었지요 다시 집어 들어 펼치자 찢어진 우산 사이로 예쁜 꽃이 피어 나를 반기는 거예요 잔잔히 웃고 있는 아담한 집도 한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딱 맞는 옷도 개켜져 있었지요 소박한 음식을 먹고 방안에 누워 맑은 노랫소리에 깨어보니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어요
김정옥 시인 / 웅덩이
바람이 우산살을 휘감는다 휘청거리는 나무들처럼 온 몸이 구부러져 펴지지 않아 반듯하게 펼쳐보려 물을 가득 머금어 삼킨다 소낙비가 내린 후 구부러진 몸이 조금은 펴졌다 천둥 치는 밤 펴진 발가락에 힘을 쭉 빼주고 실핏줄을 쓰다듬었다 주무르고 누여도 뒤엉킨 비바람은 몸을 삼킨다 끈적이는 쇠파리 떼들 막혀 있는 벽을 들여다본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새까만 동물들이 문을 가리고 열어주지 않는다 바람이 구석구석 입맞춤하며 안아줄 시간들 바람이 문을 확 열어젖히고 큰소리로 웃으며 햇볕을 잡아둘 날 구부러진 통증이 싹 내려가려나 폭우가 바람이랑 쏟아진 자리 환한 멍이 곳곳에 생겼다
김정옥 시인 / 제비집
회색 슬레이트 지붕 아래 찍찍거리는 생쥐들 밤새워 달리기 시합을 했어 네 모퉁이가 쥐 오줌으로 적셔진 천장 생쥐가 떨어질까 맘 졸이다가 잠이 들곤 했던 좁은 방안
전깃줄엔 참새들이 다닥다닥 처마 밑엔 귀여운 집 바닥에 떨어진 새끼 한 마리 넣어주었어 빨랫줄에 종종 내려앉은 잠자리들 아직도 마당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 한그루
골목을 지나면 아주머니들의 빨랫방망이 소리 이슬 맺힌 풀숲을 걸으면 한두 채 정도 나타나는 음침한 빈집들 환한 대낮에 들어가도 냉기가 쫙 흐르지
꽹과리 징 북이 춤을 추는 동네잔치 쌀도 내놓고 돈도 내놓고 어울려 먹었어
허물어진 돌담을 넘어 빨간 뱀딸기 돗나물 달래 잼피 나무꽃상여 소리 구슬피 산을 오른다
2021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등단시
김정옥 시인 / 세상의 굴
이곳에 들어온 건 한참 전이야 동굴 깊이 들어와 고약한 냄새 나는 고기를 뜯어 먹어 웃음이 떠나고 잘 보이지 않는 숨을 찾다가 눈물이 흐르다 잠이 들고 깨고를 반복 했어 꼬리가 쳐지고 초롱초롱했던 눈동자는 살짝 누르면 쑥 박혀 찌글찌글한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 피가 새어 나오다 굳어 버린 피딱지 욱신거리는 멍 자국 상처투성인 나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 채 서서히 퇴화되어 가는데 빠져나오지 못해
온통 캄캄하여 보이지 않아 손에 잡히는 건 물컹한 살이 있는 벌레일까 얼른 손을 놓았어 바스락 까까까까 울부짖는 소리 털로 무장한 짐승이 입을 벌리고 와락 들어올 것 같아 꼼지락꼼지락 발을 움직여 봐 몸은 기다랗고 여러 개의 발가락이 딱딱하게 구부러져 있어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몸을 살살 꺼내봐 부드러움은 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딱딱한 뼈가 찌뿌둥 일어나 딱딱한 머리뼈가 구멍이 난 것처럼 움푹 패었어 탱글탱글 윤기 났던 피부는 주름투성이에 죽은 벌레들이 묻어있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삐거덕 거리는 몸을 삐거덕 자물쇠로 채우고 있어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김정옥 시인 / 명태
햇볕이 짱짱하게 오전을 감싸 안고 나뭇잎 사이사이 손가락으로 움켜쥔 날 회색 시멘트 바닥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엔 바다를 헤엄쳐 다녔던 명태의 납작해진 머리가 하얗게 부서져 가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형태가 사라진 얼굴로 말라비틀어져 하얀 눈으로 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몸통은 사라진 지 오래인지 누가 몸통이 있었던 걸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면 알지도 못할 만큼 흩어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외딴곳에서 서서히 부식되어가고 있진 않은가
김정옥 시인 / 들깨 모종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들깨 모종을 솎아내어 다라에 이고 비탈진 산을 조심조심 내려와 저 너머 밭에 들깨 모종을 심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논이랑 밭에서 살아야 하는 시골살이 비가 내리니 모종 심기엔 딱이었던 날 들깨 모종의 가느다란 줄기랑 비와 바람을 곱게 심은 날.
김정옥 시인 / 빈방
우두커니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얼굴을 파묻는다 잘 열리지 않는 작은 창문 빛바랜 벽지들 낡은 옷 몇 가지 딸그락거릴 것도 없는 방바닥 희미한 거미줄이 축축 늘어져 있는 낮은 천장 구석으로 바람 소리 들린다 퀴퀴한 냄새 나는 몸에도 내려앉은 회색 먼지들 돈벌레가 스르륵 작아진 몸뚱어리를 들여놓고 쭈글쭈글한 주름살을 퀭한 눈으로 먼 산 보듯 바라본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부지런히 달려왔을까 하나하나 부서질까 깨질까 염려했을까 빈방에 홀로 남아 오래 묵은 먼지들을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바라본다 -반년간 『세종시마루』 2023년 하반기호 제11호 발표
김정옥 시인 / 생쥐 파먹고 파먹고 그래도 남은 게 있는지 들여다봐요 밑바닥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고 머리칼을 쥐어 뜯겨 한 움큼 빠졌는데 다시 찾아요 그렇게 죽을 줄 모르고 날아가는 나방처럼 달려갈 수 있을까요 조금 남겨진 딱딱한 알갱이를 발톱으로 박박 긁어요 발톱이 부러지고 피가 나요 눈물이 주르륵 흘러요 따뜻한 불을 피우고 볼을 비비며 폭 안겨 있었는데 불씨는 꺼지고 재만 남았어요 불을 켜지 않을래요 꺼진 불을 살살 불어 켜진다면 걱정할 테니까요 이미 불을 켜두었잖아요 그때처럼 환하게 켜지진 않아요 조금 어둡지만 매일 켜둘 수는 있을 거예요 빛나지 않지만 흐릿하게 볼 수 있어요 어둠 속에서 더 잘 찾아내는 동물처럼 희미해도 어디에서 숨 쉬고 있는지 알아요 지금 어디쯤인지 딱딱한 알갱이를 집어삼키곤 천천히 음미하며 씹어봐요 조금이지만 달콤한 맛이 남아있어요 침과 함께 꿀꺽 넘어가는 단맛이 발톱을 아프게 하지만 멈추지 않아요 한 톨 한 톨 아껴서 뜯어먹을 거예요 언제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질까요 -엔솔로지 『NOISE』(시사사, 2023) 수록
김정옥 시인 / 푸른 새벽
나뭇잎이 우수수 비를 뿌립니다
사과씨를 깨물었습니다 깨물어 버린 사과씨를 삼킵니다 사과를 먹다가 씨앗은 빼내려 했는데 그만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씨앗까지 넘어옵니다 껍질째 맛있게 씹어 먹었는데 씨앗에서 느껴지는 알갱이들이 까끌까끌 거리며 혀를 만지고 목젖을 지나 넘어갑니다 단단한 당신의 언어가 씨앗이 되어 잠자던 나를 일어나라고 싸리비로 쓰윽 쓰윽 새벽 공기를 마시며 마당을 쓸어줍니다 나는 잠만 자고 있는데 당신은 벌써 깨어 있네요 나는 게으르게 새벽을 보내는데 당신은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며 늦게까지 잠 못 이루네요 직접 소리 내 깨우지 않고 슬쩍 이슬 바람 불어놓고 갔는지 촘촘한 이슬들이 내 앞에 서성거려요 속살들이 떠다녀요 나는 거친 나무껍질만 보여주는데 당신은 나무 속 부드러움을 살포시 꺼내어 나의 부끄러운 민낯이 내 얼굴에 부딪혀 와요 나는 진실을 잘 알지도 속살을 어떻게 내어놓아야 할지도 모른 채 걸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살포시 뿌려놓았어요 눈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요 이슬들이 곱게 쓸어둔 마당가에 앉아요 이제 당신에게 씨앗을 꺼내는 법을 배우려 종종 당신을 만나 진실을 꺼내볼게요
나는 저 아래로 떨어져 있어요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는 그 씨앗을 깨물어 먹고 싶어요
싱그런 사과, 당분이 촘촘한 당신의 언어를 깨물어 먹습니다 -무크 『K-POEM』 한국문연 2024년 통권 제11호 발표
김정옥 시인 / 하늘
하늘을 꽉 묶어 몸통을 만들었어 웃고 있는 얼굴을 몸통에 꽂아 주고 좌우로 팔을 하나씩 끼워 주었지
빈 들판을 지키던 그는 내가 다가가면 활짝 웃어주었어 두 팔로 안아주면 온기가 전해져 옷을 벗어 던지고 안겨 있었어 밤이 되면 하늘이 이슬에 축축이 젖었다가 아침이 되면 햇살에 말라
새벽이 되면 몸통이 헐거워지고 썩어가 안아주어도 바람이 숭숭 뼈 사이로 들락여 옷을 입어도 찬바람이 파고들어 와 습기 찬 하늘을 들고 와 햇살에 쫙 펼쳐 말리고는 꽉 묶어서 데리고 갔어 하나라도 빠질까 비 내리는 곳을 피해 갔지
들판에 있던 하늘은 사르르 무너져 내려 얼굴이 엉망이 되어버렸어 웃고 있던 그는 화가 나 있었어 몸통에 달고 있던 얼굴이 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놓여 있었지
화난 얼굴을 슬며시 안아 새로운 하늘에 올려주었어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몸통을 절반 쭉 빼고는 작은 산 뒤로 흔들흔들 춤을 추며 한 팔을 두고 뛰어가 멀리서 들려오는 너의 웃음소리
-시집 『풀잎』(한국문연, 2023) 수록
김정옥 시인 / 만나고 싶은 봄
잠시 앉았다 가는 소나기였을까 고개를 숙이고 걷다 잠시 올려다본 하늘이었을까 방긋 웃고 있는 민들레꽃에 눈길 한번 쓱 주었을까 길게 너를 앉혀 두고 보고 싶어 촉촉하게 바닥을 적신 너를 하늘에 있는지 꽃 속에 숨었는지 초록 잎사귀 위 슬금슬금 기어가는 작은 벌레 뒤를 뒤적이고 있어
평생 비는 내리고 평생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 계절 따라 꽃은 피어나지
죽기 전까지 뒤적이며 찾아 헤맬 거야 이가 다 빠져도 주름이 온몸을 덮어도 눈이 가물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꽃을, 나뭇가지 그림자를 보며 너를 찾을 거야 소소한 이야기에 크게 웃을 거고 웃음이 끊이지 않을 거야 손이 얼굴로 머리카락으로 옮겨갈 때마다 눈빛은 너를 보며 빛나고 있을 거야
잠시 들렀다 가는 소나기가 아니야 종종 날아드는 새처럼 집 앞 나뭇가지에 앉을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찾을 거고 나는 그런 너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겠지 푸드덕 날아가도 다시 찾아올 너를 기다릴 거야 창밖을 자주 내다볼 거고 따뜻한 봄을 만날 거야 네가 주는 봄을 평생 맞이할 거야
-시집 『풀잎』(한국문연, 202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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