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민철 시인 / 호수의 브로치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0. 20:58

김민철 시인 / 호수의 브로치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 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 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 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김민철 시인 / 모든 요일의 여행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철 시인 / 나무도 스키니 진을 입는다

 

 

내가 스키니 진을 입은 나무라서 이상한가요?

이별했거든요, 딱따구리를 불러 배꼽에 피어싱 하고

옹이무늬 배꼽티를 입고 다닐래요

저녁노을을 삼킨 습기 찬 공기에게

밤새도록 아침이슬로 무지갯빛 염색을 받고

매일매일 색 다른 나뭇잎 가발을 쓸 거랍니다

나는 쇼윈도의 마네킹보다

햇살로 화장을 아주 진하게 할 거라구요

잘록한 쇄골에는 꽃송이 향수까지 뿌리려구요

이 향기에 한눈 판 새들은 텃새가 되어버리고

매미 울음에 반한 산짐승들이 내 허리에 몸을 비비다

한 움큼 털이 뽑혀 가슴을 하얗게 드러낸 한여름,

나는 겉옷을 더 피어내어 푸르른 척할 거예요

한때는 흙이 바람에 펄럭이는 치마였는데

이제는 속살을 내비치는 일은 없을 테죠

나는 뿌리라는 천 개의 다리를 가졌지만,

떠날 구름에게는 다리 하나도 내놓지 않을래요

풀벌레 소리가 우듬지에서 말라 버석거려도

몸을 옮겨 심지 않고 빗줄기가 나를 찾아오게 할래요

뿌리를 깊숙이 뻗으면 뻗을수록

흙이 스키니 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오늘따라 허벅지가 꽉 조이는군요

 

<문장웹진> 2012년 10월호

 

 


 

 

김민철 시인 / 논을 빨래하는 시간

 

 

어린 벼가 여전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 것일까

벼의 아랫도리에 잡초가

얼룩처럼 누렇게 묻어 있다

그때 우렁이는 세재 가루가 되어 논을 빤다

빨판으로 반점이 생긴 잎을 꾹꾹 누르고 펴고

소용돌이를 닮은 껍질로 물을 돌리고

가장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아직은 아이처럼 햇살과 놀기 좋아하는

벼의 목덜미에 남은 땀 냄새를 맡았을까

물에서 막 피어난 잡초줄기마저 세척하여

어둠조차 푸르게 만드는 우렁이,

오늘도 벼는 매일매일 깨끗한 빛깔을 입고

논물 위에서 살랑살랑 뛰어노는데

종종 하루 종일 빨래가 쌓이는 시간이 싫었다

새똥이 가슴팍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먹구름이 손발까지 검게 물들면

고무장갑과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우렁이는 논두렁 밖으로 나가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허리 근육이 얇은 할머니를 생각하며

갈비뼈 하나를 잃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렁이는 온몸을 적시며 기어이 빨래를 끝낸다

못줄의 간격을 기억하고 있는 벼들이

뽀송뽀송한 갈색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제2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전국 공모전 대상 당선작품

 

 


 

김민철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同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