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경림 시인 / 허공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0. 21:13

박경림 시인 / 허공

 

 

나는 허공을 데리고 걷는 습관이 있네

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허공이 나보다 먼저 나서서

길을 재촉했네

소음들로 빽빽대는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거나

의자에 앉아 슬쩍 딴전을 피울 때도

허공은 눈앞에서 아른아른

떨어지지 않았네

 

내가 급히 걸을 떄나 느릿느릿 걸을 때나

그는 언제나 나의 앞에서 걸었네

때로 그는 내 머리 속을 빙빙 돌며

나의 심기를 어지럽혔네

친구를 만나 몇 시간씩 수다를 떨 때도

죽은 듯 옆 자리에 앉아 재촉하지 않는

그의 속을

아무래도 나는 알 수가 없네

 

그러나 그는 나를 억지로 붙잡고 늘어지지 않네

우리는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지만

시비를 걸며 엎어지고 깨져 본 적도 없네

 

때로 헛것이 보여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붉으락푸르락 안면을 바꿔도

그는 그저 떠나지 않았네

그와 나 해물파전 사이를 겉돌며

취한 술 사발 속을 건너다닐 때

나는 그의 옆자리에 그의 허공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네

 

그러나 나는 자주 그를 껴안고 뒹굴거린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예술가』 2020-여름호 <시인해부/ 근작시/ 평론>에서

 

 


 

 

박경림 시인 / 강가

 

 

당신이 허락한 만큼 내 몸 키우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허락한 물결만큼 섞이고 싶었지요

 

내 몸 키워 강물에 섞고서야 알았답니다

 

안개를  덮고 우는 새벽이 있어야 짙푸르게 깊어 질 수 있다는 것

 

마음 놓고 잠길 수 없어 더욱 깊어진 가슴을 안는다  해도 당신에게는 언제나 처음이고 싶었습니다

 

 


 

 

박경림 시인 / 우주 만상 속의 당신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있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 넝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박경림 시인

경기도 장호원에서 출생. 1995년 《한국시》를 통해 등단. 시집 『3년 후에도 그리워진다면』 『푸카키 호수의 침묵』, 산문집 『아름다운 오해와 슬픈이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