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봉 시인 / 길의 배반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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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봉 시인 / 길의 배반
폭설로 깊은 산 속에 갇혔다 갑자기 길이 사라졌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땅속으로 가라앉은 것인가
길의 배반
나는 길의 배반 앞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길이 없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 사지가 멀쩡한데 이 억제된 생명은 꿈속으로 빠져든다
꿈속은 수렁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리는 옴짝달싹 못한다
육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죽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육신만 존재하고 의식은 없는 것 눈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다
김도봉 시인 / 루이강 또는 알토
녹슨 배 루아르 강변에 몸 부리고 있다
돌아온 집시
거친 파도에 얻어맞은 옆구리가 아프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던 강둑 담쟁이 덩굴도 생장점을 멈춘 채 가쁜 숨을 토해낸다
음습한 찬 바람에 된서리를 맞아 선실에 내려앉은 마로니에 잎새 갈색 녹이 슬었다
루아르강 물결을 타고 늙은 알토의 목청에서 울려나오는 애수띤 선율이 선실 속 먼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쓸쓸함 위에 포개어 쌓인다
김도봉 시인 / 파리 지하철
검은 때가 잔뜩 낀 지하 동굴 퀘퀘한 냄새에 속이 미식거린다 동굴 벽면 여기저기 갈겨 쓴 글씨들 분노와 슬픔이 매달려 있다
어디선가 절름거리는 노래가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스쳐오는 목쉰 바람의 소리 피로 물든 안데스 산맥의 아픔들이 출렁인다 검은 눈 검은 머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잉카의 후예들
정복자들이 총부리와 전염병으로 사라져 버린 제국
지하 동굴 한 귀퉁이 검은 머리 소녀가
음악에 취해 며칠째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다
김도봉 시인 / 재회 - 의류 수거함
썰물처럼 빠져나가 썰렁하더니 새로운 녀석들이 계속 들어와 섞인다 평생을 같이 살다가 사별한 노인 한 번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버림받은 숫처녀 몇 달 동안 씻지 않아 똥 구린내 펄펄 풍기는 놈들도 있다 옆집에 살면서도 우연히 마주칠 때 애써 외면한 아주 어색한 사이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두 팔 벌려 서로를 끌어안는다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따뜻하고 정겹다
-시집 <길의 배반>, 미네르바,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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