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연 시인(안양) / 알츠하이머병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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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연 시인(안양) / 알츠하이머병
나는 자꾸 반복한다 우체부가 다녀갔네 우체부가 다녀갔네 언어를 배달하려고 우체부가 다녀갔네 빌붙듯 자꾸 되씹으며 반복한다 그 해 여름, 그와의 마지막 긴 여행이었다 내가 물고기로 변해도 춤추는 절름발이 새가 되어도 어둠에 별로 가서 박혀도 중력처럼 끌어안아 주리라 했다 물빛은 생각들을 반사해 돌려보내고 깨진 크리스탈 유리잔의 잔상 물 속에 떠다녔다. 하나씩 언어들을 반사해 물 밖의 나뭇잎들을 타겟 삼아 방아쇠를 당겼다 초록 나뭇잎 등뒤에 크리스탈 총알들이 유리빛으로 박혔다 빈혈처럼 어른거렸다 그 해, 마지막 여름이 다녀가고 있었다 나는 자꾸 반복한다 우체부가 무슨 뜻이지? 우체부가? 깨진 크리스탈 언어들 보이지 않는다
-『시안』 (2003. 봄)
유수연 시인(안양) / 세상에 나오지 않은* 노래
햇빛을 잘 말려 구운 음색에 적당한 그늘을 입혀 취한 물 속 오선 위에 올리면 햇빛의 달콤함은 적당히 젖어 쫄깃하고 기막힌 노래가 된다
나는 어린 기억 속 그늘에 숨은 늙은 어둠 속 그늘이다
잘 말린 젊은 네 모습이 제 모습인 줄 아는 늙은 그늘이다
햇빛 반짝 터지는 순간 그 애가 타는 눈빛으로 내 눈빛을 훑고 가는 이미지
제 보고픔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눈빛만 햇빛후레쉬처럼 터지는, 아름답다 그 눈빛 잠깐 스치는 사이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생리혈이 터진다 그건 잘 말린 젊은 네 모습이 제 모습인 줄 아는 희고 붉으나 정갈한 흰색에 가까운 노래이다 연출자는 네 그늘 햇빛 달콤하고 적당히 젖은 네 그늘은 이미지가 굴절시킨 오선 위에 세상에 나오지 않은 노래가 된다
*김종삼 시「배음背音」중에서
-『시안』 (2008년 봄호)
유수연 시인(안양) / 해남 땅끝마을 ・이중섭,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해남 땅끝마을, 어디서 음악소리 들린다 하프에 부딪는 은빛 지느러미 흘러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다 꽃게 발에 걸린 안개비파 소리인 것도 같고 발가벗은 사내아이 고추를 문 꽃게의 장난스런 뽀글거림 같기도 하고 겨드랑이랑 가랑이랑 사이사이 포개지고 겹쳐진 살비듬 문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땅 끝에 와 닿고 싶었다
여기서 나는 肉囚가 아니다 내가 덮어쓰고 있는 갑각의 사고는 본래 내 것이 아니다 포개고 겹쳐지는 살비듬 문지르는 소리, 손끝 그대 속살 감촉이 지우는 모든 경계, 거기서 퉁겨져 나오는 음악, 수평선을 지운 바다만개가 하프소리 같은 띠를 두르고 있다 그 띠 한쪽을 격하게 당긴다 겨드랑이와 가랑이 사이로 물의 손길을 닮은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이 당겨진다 웃음소리 까르르 까르르르 하프줄에 부딪친다 갑각의 딱딱함을 뚫고 알몸 히 파고드는 미분의 음표들이 절정의 화성이 되는
해남 땅끝마을에 닿았다
유수연 시인(안양) / 꿈 속에 능소화가 -대상 Libodo에 대해서
나는 능소화로 나무 가지를 감아 오르고 있었지. 나는 내가 그 나무에 핀 꽃인 줄 알았어. 나는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나무의 우듬지까지 한 몸인듯 감아 올라가 피어 있었지.
나무의 눈은 먼 곳의 산과 하늘의 구름을 읽을 줄 알아 언제 비가 올지 말해주곤 했네. 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음색으로 가득했네. 비가 오면 땅 속에서조차 내 뿌리로 그를 감고 있었는데 왠지 그 길의 내력(來歷)을 나는 알 수 없었네. 어디선가 날아온 길모퉁이 각진 돌멩이. 명치께에 피가 고였네.
(나무 위에 붉게 피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닐지도 몰라 아래 뿌리를 내려다보고 저 이제 그만 가야 할까 봐요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나요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난 네 몸 아니야 나무의 보이지 않는 음색, 생과 주검 그 간격만큼 나를 밀어내고)
저녁의 능소화 낯빛 붉게 흔들리고 있었지.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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