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균수 시인 / 바람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1. 17:05

박균수 시인 / 바람

 

 

바람에게 무엇을 바라나

풀잎인 그대를 흔들고

머리결인 그대를 쓰다듬고

지나가네

무게도 부피도 없이

빈 마당인 그대를 비질하고

먼지들인 그대를 일으키고

조약돌인 그대를 덜어내고

이름들의 숨결에 녹아 있는

움직임일 뿐

거미줄인 그대를 반짝이고

새벽 물결인 그대를 깨우고

찬 이마를 가리며

그리워하는 그대인 그대에게

가늘게 입 맞추고

지나가네

짧은 지속일 뿐

 

 


 

 

박균수 시인 / 관리인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머무르고 싶으실 때까지 머무르시다

떠나고 싶으실 때 떠나세요

다녀보셨으니 아시잖아요

문을 열어보시고

맘에 드는 빈방이 있으면 누우세요

배가 고프시면 냉장고를 열어보세요

상한 음식도 있을 거예요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드세요

가스레인지가 있으니 조리해 드셔도 돼요

때때로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니 주의하세요

보일러가 제멋대로라 냉난방이 불규칙해요

고치려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기술자를 찾을 수 없네요

너무 뜨거워지면 폭발할 수 있는 물건들을 치우시고

너무 차가워지면 뜨거웠던 때를 떠올리시며

두꺼운 이불을 꺼내 덮으세요

더운물도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 해요

아예 찬물에 익숙해지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며칠씩 정전이 될 때도 있으니 당황하지 마세요

서랍을 열어보시면 울다가 멈춘 양초가 있을 거예요

방마다 인터폰이 있지만 불통이에요

선이 어디인가 끊어진 모양이에요

가끔 모든 인터폰이 일제히 울려대요

신기한 일이죠

받지 마세요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래바람만 웅웅대요

심심하시면 영화를 보세요

커튼을 걷으시면 밤으로만 이어지는 창밖으로

야외극장 스크린이 너울거릴 거여요

놀라운 일이죠

24시간 쉬지 않고 영화가 상영되는데

대부분 지루한 신파예요

그렇다고 너무 깊이 주무시지는 마세요

밤이면 가끔 하수가 역류해서

방안까지 물이 밀어닥치거든요

침착하게 비상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셔서

달이 뜰 때까지 견디세요

밀물 썰물의 과학을 아시잖아요

달이 물을 모두 마셔버리고 취해 비틀거리면

갯벌 같은 방바닥엔

대부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른 먼지만 갈비뼈를 드러내고 누워 있죠

진공청소기나 한 번씩 돌려주세요

다른 방 손님이 보이시면 안면을 익히세요

오래전에 왔던 손님일 거예요

굳이 친해지실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서로의 습관이나 동선 정도는

알아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사나운 손님들도 있어요

갑자기 깨지는 소리나 비명이 들리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왜 그러는지 뻔하잖아요

외출 외박은 자유고 방세는 없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고

머무르고 싶으실 때까지 머무르시다가

떠나고 싶으실 때 떠나세요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가실 땐 가능하면

가져왔던 것들을 모두 가져가 주세요

남겨진 것들이 거치적거리기도 하고

더러 위험하기도 하더군요

언젠간 꼭 가셔야 해요

물론 그러실 테지요

제게 미리 말씀하실 필요는 없고

언제든지 그냥 가시면 돼요

이렇게 불편하고 더러운 집에

오래 머무르실 일도 없겠지만

혹시 눌러살고 싶으시다면 맘대로 하세요

제가 떠날 때 같이 떠나시든가요

너무 오랫동안 영문도 모르고

특별히 관리할 것도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어요

바깥세상도 궁금하고요

글쎄요

언젠가 떠나겠죠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2022년 가을호-

 

 


 

 

박균수 시인 / 거미가 바람에 실을 날리고

 

 

어둠의 살갗에 소름 돋아나고

표정 잃고 누웠네

울며불며 빼앗아온 입자들

하나씩 돌려주고

입이 열려

진균이 혀를 먹고

내장을 소화하고

벌어진 컴컴한 공간

거미가 바람에 실을 날리고

차원을 이어 붙여 집을 짓네

초라한 은하들이 피었다 지고

그대 잃고 내 마음도 누웠네

제 몸의 독 펄펄 끓어

신열에 들뜬

길고 긴 뱀처럼

그리운 생각 들어오네

 

-시집 <소멸의 산책>(문학의숲)에서

 

 


 

박균수 시인

1968년 경남 울산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 당선.  2000년 Chicago Art Institute 대학원 졸업 (영화연출 전공). 현재 영화 연출 준비 중. 시집 『적색거성』 『소멸의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