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언주 시인 / 등대슈퍼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1. 17:10

이언주 시인 / 등대슈퍼

 

 

달리던 7번 국도가 길을 멈춘다

하늘이 물빛으로 가라앉은

죽산 앞바다

등대보다 집들이 먼저 불을 켠다

몇백 광년쯤 떨어진 눈이 반짝인다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만

당신은 없고 나만 있다

 

얼마나 많은 파도를 넘어야

기억의 안쪽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길을 묻기 위해 등대슈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빛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와서 저마다 몸 안에 감겨 있는 항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굽은 등에 남은 잔광이 희미하다 테이블 구석 엎드려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고 푸르딩딩한 눈두덩이에 아이새도 짙게 그린 여자가 아이 오줌을 누이러 밖으로 나간다

 

-계간시 전문지 <포지션> 2017년 겨울호

 

 


 

 

이언주 시인 / 안녕, 바나나

 

 

 외신에 따르면 바나나 전염병 TR4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바나나가 지구상 에서 사라질 것이다

 

 곰팡이 하나로 멸종하는 바나나

 마트 진열대에서 바나나가 없어지고 바나나 맛 단지 우유가 없어지고 바나나는 길다는 말이 없어지고

 마트 주인은 빈자리를 채우고 바나나 우유를 찾던 아이는 딸기우유를 마시고 바나나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바나나에게 내일이 없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현대시학> 2016년 3월호, 신작시·

 

 


 

 

이언주 시인 / 벚꽃 습관

 

 

벚꽃에서 화약 냄새가 난다.

 

벚꽃은

터지면서

 

허공을 탈색시켜 놓고

 

군데군데

섬처럼 떠 있다.

 

얼룩은 구름으로도 충분해서

 

허공을 가리는 벚꽃을

봄비로

지우는 중이다.

 

꽃이었던 곳을 맴돌며

목구멍에 핏발 세우는 나는

벚꽃으로 분류된다.

 

-시집 『처음인 양』에서

 

 


 

이언주 시인

대구 출생. (본명: 이은영). 2011년 제20회《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그림자 극장』. 서울디지털대학교사이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