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춘 시인 / 연애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1. 17:18

김춘 시인 / 연애

 

 

 소매 끝에서 바람은 시작된다. 사과 한 알이 제 몸에 늪을 만들어 나비를 키워낸다. 나비는 대代를 이어 바람을 먹이느라 날갯짓을 멈출 수 없다. 바람이 사과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헤친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접히는 절정, 시간의 항체가 만들어진다.

 

 절정을 넘보는 구름이 있다. 슬픈 아가미를 가진 구름이 낳은, 알들이 쏟아진다. 날치알 같은 빗방울을 입안에 넣고 오도독 터뜨려 봐. 떠난 애인의 머리카락 냄새가 나기도 하는 쓸쓸한 맛이야. 가끔은 구름이 천둥번개로, 바람을 후려친다.

 

너를 안는 일은

너무 뜨겁다.

 

그런 너를 잊는 일은

견고한 그림자를 한 겹 더 껴입는 것.

 

생이 바삭해질 무렵

다시 꿈이 꾸어지고.

 

 


 

 

김춘 시인 / 물길

 

 

 골짜기가 바람을 한 입 가득 품었다가 내뿜는다. 안개가 피어난다. 안개 너머로 구름이 그윽이 바라본다. 구름 떼가 둥글게 뭉친다. 흘러내리던 둥근 잔해가 빰에 그대로 매달린다. 단단한 열매다. 열매는 시간을 기르며 익는다. 그 사이 골짜기는 자주 안개를 만들고, 별들의 발길도 잦았다. 다 자란 시간은 열매의 등을 가르고 튕겨 나온다. 시간이 물고 있는 어린 눈빛은 투명하다. 어린 눈빛 속에 너의 어제가 있다.

 

 투명한 눈빛이 눈빛끼리 만나, 계절이 뜨고 지는 골짜기에 물길을 낸다. 나무들 몸을 틀어 물길을 향해 굽는다. 산그늘의 푸른 혀는 무덤 앞에 놓인 꽃을 핥는다. 새보다 더 새같이 우는 짐승이 구름 떼 속으로 사라지고, 밤보다 더 어두워지는 너는 남는다. 너는 헐거운 도시가 흘린 불온, 처벅처벅 물길 속 달빛이 흩어지는 밤은 길다.

 

 


 

 

김춘 시인 / 자폐일기

 

 

 그가 지역 신문을 옆구리에 척, 끼고서 당당하게 걸어간다. 아침이다. 출근하라. 이 도시가 그에게 입력시킨 명령어. 동네를 두 바퀴 돌고 온 후, 슈퍼 앞 자판기에서 백원짜리 커피를 빼어 들고, 그는 씨익 미소를 흘린다. 집으로 출근하는 그의 몫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걸 자주 보았지. 눈동자에 풀어놓은 꿈은, 환한 낮에도 가두지 못한다. 그의 현실은 식후에 삼키는 캡슐에, 갇혀 있다. 현실과 교신이 끊긴 뇌가 그를 재운다. 노모의 눈물로 깔아놓은 푹신한, 요 위에서 가장 행복한 잠을 잔다. 적막 속에 가라앉은 집, 노모가 마루 한 쪽에서 공처럼 고부리고 앉아 쪽파를 다듬는다. 쪽파 머리가 왜 이미 맵다냐, 혼잣말이 정적을 두드리고 간다. 그가 깨어나자, 가라앉았던 집이 떠오르며 부표처럼 흔들린다. 세 번 째 캡슐을 삼킨 그가, 퇴근하기 위해 골목을 나선다.

 

 


 

김춘 시인

충남 안면도 출생. (본명: 김종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2010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 『불량한 시각』. 현재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