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훈 시인 / 과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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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훈 시인 / 과녁
은해사 돌구멍절로 가다 장맛비에 새끼를 데리고 온 한쌍의 꿩을 보았다 순간 기름진 고기를 상상하며 다부지 게 주워 든 몇 개의 돌멩이, 꿩부부는 뻣뻣한 과녁처럼 앞을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섭심을 놓아버린 가여운 중 생, 불끈 힘 좋은 살기로 던진 돌멩이가 장끼의 꽁지깃 하나 가볍게 떨구고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대신, 과녁을 비껴간 돌멩이 하나, 내 심장 깊이 명중되었다
장맛비가 죽비처럼 등줄기를 때리는,
장병훈 시인 / 하늘 납골당
고품격 프리미엄 납골당이 있네 꿈에그린, e편한세상, 푸르지오 납골들은 모두 아카데미스위트 꿈꾸네 콘크리트 납골당 비추는 수믄등 아래 비밀번호 잃은 치매 든 납골 하나 허무하게 무너져있네 우리집은 저기 하늘 납골당이라오 늦은 시각 성묘객들이 잘 마른 납골을 걱정하네 어떤 이는 젯밥을 차려주고 어떤 이는 향을 피우네 대도시 역세권 공중은 칸칸 납골당 미궁으로 높고 길쭉한 콘크리트함들이 허공에 걸려있네
장병훈 시인 / 금싸라기 참외와 시
병훈아, 시집 부칫다민서, 니도 주소 쫌 찍어보거래이 내가 농사 진 참외 쬐끔 부치 주꾸마
어이쿠, 영태야 더운 날, 비닐하우스서 애지중지한 전국에서 가장 돈 된다는 금싸라기 성주참외를 거저 얻어 묵어서 우짜노 (그것도 돈 안 되는 시집 한 권, 달랑 받고서는)
아이다. 친구야 니도 뼈를 녹하 가지고 맹글은 시집인데, 참외 농사나 글 농사나 잠 못 자고 맹글은 거는 똑같은기라
그래, 그래 얘기 해 주니 고맙데이 전국에서 제일도 맛있다는 성주 참외 그것도 영태 니가 특별히 보내준 금싸라기 참외 묵고, 내 글밭에도 금싸라기 시어들로 가득 채워 보꾸마
영태야 그리고 니한테도 농사 일이 힘들 때 마 니가 맹글은 참외보다는 밉게 생기고 맛이 덜한 시편들이나마 위로가 되는 말씀들이 숨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와 이리 신경이 자꾸 가는지 모르겠는기라
―『불교문예』 2013년 가을호
장병훈 시인 / 시월 2
청도의 감들은 씨를 죽였다 씨 없는 감들은 가볍다 다른 곳에 태어날 필요도 없다 나도 그만 그것을 떼어버릴까 그러면 더 가벼워질까 제 몸의 ‘ㅂ’을 떼어버린 시월도 시월시월 가볍다
씨알머리 없이 헤헤거리며 가을을 횡단한다 더 가벼워지기 위해 살을 버리는 가을의 충혈 씨를 털어버린 백발의 억새들이 백만 개의 빗자루로 하늘을 쓸고 있다
-시집 「붉다」 2013년 황금우물
2008년 <심상> 하반기 신인상 당선 작품 장병훈 시인 / 거룩한 안주
제삿날 오랜만에 일찍 모인 형제들 (시간 죽이러) 호프집에나 가볼까(경건해야지, 애비 제사 전에 술이라니) 타박하시던 울 엄매(술 좋아 하시던 당신 탓이려니) 그래도 요즘 세태 따라야지 눈 감고 모르는 척 울 엄매
안주로 나온 새우들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 딱딱한 것도 한 때 태평양을 유유히 즐기며 자유 만끽하던 한 작은 물결이었을거야 (아니, 바다의 무게 감당 못한 작은 파도였을지 몰라) 등이 휜 새우 씹으며 형제들 노랠 불렀네 공테프 찍찍대는 소리 흘러 갔었네 등이 휠 것 같은 삶이여 봄날은 잘도 갔었네 (그랬지 임종 날 아버지도 저렇게 등이 휜 새우 같았지) 자식들에게 생의 속살 죄다 내 준 채 허무의 등, 휘어져 떠난 아버지
제삿날 초저녁부터 우리 형제 등이 휜 아버지를 씹고 있었네
장병훈 시인 / 길 위의 명상
19번 국도, 무진장소방서와 장계고물상계량소 그리고 장계하수종말처리장 팻말이 연이어 보인다 재미있는 이름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다가 순식간에 뒷골을 치는 화두 하나!
오호라, 저 길 위에 열반의 수행방법이 있었구나 무진장소방서에서 무진장 눌러붙은 세속의 불을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다스리고, 장계고물상계량소에서 내 영혼의 참된 무게를 달아보자 황홀하고도 서늘한 죄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썩은 놈은 장계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라는 것이겠지 길 위에서 불현듯 불쑥불쑥 나타나는 지지리도 못난 이름이라 여겼던 하수종말처리장, 지금에야 생각하니 영혼의 썩은 물 걸러내고 부활을 약속하는 성소일까
장수군 장계면에서 진안으로 가는 19번 국도에서 생천生天의 도를 만났네
장병훈 시인 / 뿌리의 교신
하늘길을 낸 나무들의 행렬 세월을 담금질한 시원始原의 바람 나무들의 몸 읽고 간다 나무는 제 몸이 나무다 나무는 제 영혼이 나무다 나무에 등을 기댄다 나무의 맑은 말씀 내 혈관을 타고 온다 나의 뿌리들, 나무 뿌리와 얽힌다 하늘의 길은 뿌리의 길 땅바닥에 발을 딛고 처음 하늘을 본다 묵언수행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땅 밑으로 혈관들, 은밀한 교신 꽃 피고 바람부는 까닭을 맑은 수액으로 타전한다 나무와 나 서로의 가슴에 돋을새김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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