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섭 시인 / 산책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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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섭 시인 / 산책
오후의 햇살이 내 손을 잡아요 걸어볼까요,혼자가 아니라는 것 어디까지 가보아야 알게 될는지요
당신의 향기조차 기억나지 않는군요 소곤거리던 목소리 지워져 버렸구요 적막뿐인 골목을 돌아 광장 의자에 앉아요
이 거리에 사는 오래된 바람이 말을 걸어오는군요 내 부스러기를 먹으러 달려오는 비둘기들, 비둘기 그림자들,
이토록 찬란한 도시의 음악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생각을 천천히 가위로 잘라 편집해야만 해요
발끝을 짓누르는 붉은 노을 어디인가로 이제는 돌아서야 한다는군요, 오늘도 여기까지 오고 말았답니다
김유섭 시인 / 지나간 생을 만지작거리다
찐빵을 사 먹던 곳이 꽃집으로 바뀌었다 찐빵들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나 솟아오르던 뜨거웠던 김은 잘 사는지 소식도 모르는 날들 눈이 날리고 비가 쏟아져도 대답 없이 분식집으로 몇 번인가 바람에 은행나무 노란 이파리가 떨어지더니 희극에서 비극으로 뚝딱뚝딱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철물점으로 흘러갔다 걸음을 멈추고 낯선 시간 앞에 서서 나는 중얼거리다 저곳에서 찐빵을 먹으며 웃었는데 벽과 천장과 바닥에까지 주렁주렁 널려있는 서먹하기만 한 쇳덩이들 옷만 바꿔 입고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접시 위에 소복이 담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그때 찐빵 맛이 혹시 날까 철물점 안으로 들어가서 칼이나 망치 자물통을 만지작거리다
김유섭 시인 / 복서
비웃음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주먹이 아니다.
짧은 한숨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심장 박동이라고 믿는다.
공기를 갈라 하늘로 치켜든 턱을 일그러뜨리고 말아 쥔 손의 악력으로 배시시 내리뜬 황금 눈빛의 뼈를 부술 것이다.
악어가죽을 두른 서러움을 모르는 허리를 찍어 두들길 것이다.
신장이나 콩팥이 덜렁거리겠지. 관중도,환호도, 챔피언 벨트도 없는 링
조명 따위 사라진 지 오래지만
어금니 악물고 주머니 속에 감춰 둔 것이 있다
김유섭 시인 / 적국의 여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기
다섯 번째 돌고 있는 소방서 버스 정류장 앞 5층 건물 바람이 흔드는 공원 플라타너스 이파리 그늘을 좋아하지
아이스크림 가게 그늘막이나 동네 슈퍼 파라솔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검은 열기는 떠도는 나를 녹일 듯 타오르고 보도블록에 발바닥을 덴 적 있지
달리던 택시가 연기를 토하는 것 보았어 8월인 거야,
아이가 얼음이 가장 빨리 녹는 달이라고 했지 나에게 허락된 것은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기
김유섭 시인 / 투명코끼리
도시 뒷골목에 사는 투명코끼리 눈물로 낙서한 벽 속에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늘 끝자락을 지나가며 우는 무늬 철새
길게 코를 뻗어 아스팔트를 더듬을 때 빌딩 사이로 질주하는 자동차들 엔진에서 터져 나오는 금속 굉음 휘황한 전등 불빛에 가려져 잊혀버린 별
스마트폰에 묻힌 사람들 바쁘게 몰려가는 곳이 어딘지 코끼리는 번쩍이는 전자발걸음에 눈을 감는다. 숲과 들판과 강물의 냄새를 맡은 지 오래,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지평선 텅 빈 거리를 휘감는 플라스틱 먼지 속에 투명을 벗지 못한 코끼리가 산다.
김유섭 시인 / 발광다이오드 별
강철로 접은 새들이 날아다닌다. 플라스틱 물풀 우거진 강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복사된 흑백 나무들
곪아버린 탄소 덩어리 떠다니는 노란 대기권을 향해 솟아오른 스테인리스 첨탑,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서
빛은 휘어져 죽는다. 수억 년이 지나가도 썩지 않을 소용돌이치는 삼중수소 구름
손바닥에 떨어지는 비가 살을 뚫는 우라늄 액세서리라고 기계 엔진 굉음을 흥얼거리면서
황금사슬에 묶인 굽은 척추 몇 개가 자꾸 별인 척, 지갑에서 발광다이오드 조명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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