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옥 시인 / 아픈 세상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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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옥 시인 / 아픈 세상
푸르디푸른 하늘 누가 죽였나 내가 자는 동안 내가 우는 동안
달빛 그림자 밟고 왔는데 나를 인도하던 달은 또 어디로 숨었는지
홀로 가야 하는 나에게 차가운 바람은 오락가락 사방 어둠 내리는데
아득하게 흘러간 황매화 지던 시절
아프다 세상이
-시집 <울다 남은 웃음>에서
김원옥 시인 /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가을 하늘 하도 푸르고 푸르러
햇볕 잘 드는 너럭바위에 앉아 계곡물에 발 담그고 진종일 이런 일이나 해봤으면
경련 자주 일 으키는 위장 꺼내 발동기 달아주고 제 맘대로 울컥울컥 뻘건 피 토해내는 심장에 초침 분침 잘 맞는 시계 하나 놓아 한 땀 한 땀 흔적 없이 꿰매 주고 자글자글 잔금투성이 얼굴 푸우 물 뿌려 다 리미질도 하고 곱사등처럼 등짝에 붙어 있는 걱정 하나 덩더꿍 덩더꿍 망나니 칼로 번쩍 떼어내고 김밥 도시락 만들어 옆구리에 끼고 속살 다 비치는 분홍 옷 입고 계곡물 따라 흘러 흘러 삼도내 로 가서 사공 불러 뱃놀이도 해보고 두 손가락 입에 물고 휘파람도 불어보고 옆구리 서로 껴안고 춤도 한번 추어보고 칡넝쿨 끊어다 밧줄 만들어 분홍 옷 휘날리며 훠이훠이 쌍그네도 타보고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온산을 가득 안은 계곡물 하도 맑아서 가을 하늘 하도 푸르러 푸르러서
-시집 <바다의 비망록>에서
김원옥 시인 / 그날
그날 그를 깊은 땅에 묻었다
내가 차마 첫 삽질을 못했는데 인부들은 땀 흘리며 달구질을 한다
먼발치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말을 잃은 그가 눈길로 하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오른다 귓가에 맴도는 이 웅얼거림은 아직 따라가지 못한 말들인가 7월의 햇볕 아래 시원한 이 바람은 그의 선물인가
드디어 끝이 없을 것 같은 그의 삶에 끌려 다닌 일생이라고 여기던 것들 저 푸른 하늘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조개구름 사이로 날아간다
그는 깊은 침묵 속에서 조개구름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생멸의 거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리라
그냥 그렇게 탈상을 하자
김원옥 시인 / 루앙의 새벽
곤히 자는 엄마 깰까봐 칭얼대는 아기 폭 싸안고 베란다로 나온다
잔디 풀잎 이불 삼아 자던 방울새 가족 자분자분 내린 이슬비에 잠이 깨어 미처 물러가지 못한 어둠을 쪼고 있는데 아기의 연지 볼 같은 새벽이 방긋이 열리고 있다
먼데 성당에서 종소리 들린다 첫돌 갓 지난 아이가 피어오르는 동살과 함께 세계로 한 발 내딛는 걸 본다
이제 머잖아 바람개비 날리며 뛰어가는 걸 볼 것이다
아아, 한 발짝 한 발짝 내게로 다가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확실한 내일을 한아름 껴안은 새벽이여!
김원옥 시인 / 사랑 둘이서 다니던 길 예쁜 꽃 심어 잘 닦아 놓고 자주 오고 가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 삐끗하여 미끄러져 다치면 오고 가지 않아 그 길 위에 무성하게 자라는 잡풀
김원옥 시인 / 울다 남은 웃음
무지개가 떴다 그것은 낮의 빛 속에서 오래도록 영롱했다
어느 날부터 한 색깔 한 색깔 하늘 골짜기로 떨어져 갔다 떨어질 때마다 괴로움이 필요했던 것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의 바람을 얼굴에 맞곤 했다
격렬하게 엉켰던 시절이 가고 칼날처럼 황폐해진 세상에서 상처받은 시간이 지나 아름드리나무들의 검게 탄 미소 위에 남은 일그러진 두 색깔
삶의 무익성 속에서 침묵을 지키게 될 그날은
-시집 《울다 남은 웃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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