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동재 시인 / 보름달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2. 18:41

이동재 시인 / 보름달

 

 

수박 한 덩이 품고 있는 우물

 

같은

 

여자는

 

자꾸 수박을 먹지 말라고 한다

 

 


 

 

이동재 시인 / 내가 나를 보니

 

 

보름달은 제 스스로 허무의 배를 짓고

 

바다를 미끄러져 옵니다

 

조금 아주 조금 전 저녁해는 그리움의 배를 불사르며

 

바다를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동재 시인 / 소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저 물오른 무논을 갈아엎고

싱싱한 대지를 뒤엎던

고삐 풀린 소들은 어디로 갔나

해마다 봄이면

겨우내 여물 씹던 외양간을 박차고 나와

하루 종일 쟁기질을 하던

한국의 그 황소들은 다 어디로 갔나

겨우내 이불 속에서

여인네의 젖가슴을 주무르던 두 손으로

그 쟁기 힘차게 부여잡고

한 해를 호령하던

그 당당하던 한국의 사내들은

또 어디로 갔나

다 어디로 가버렸나

 

 


 

 

이동재 시인 / 근무일지

 

 

내가 시집이나 소설집을 낸다는 건

언감생심 베스트셀러는 고사하고

하찮은 상업적 유통도 아니고

사소한 국가기록물을 생산하는 일

꾸역꾸역 아무도 보지 않는

시집을 내고 소설집을 내는 건

그냥 이 세상 근무일지 같은 거

 

 


 

 

이동재 시인 / 시인의 술자리

 

 

김이박, 남자 시인 셋이서

양꼬치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이 김형! 거, 양하고 해봤어?

김 으음, 박 양이나 김 양하고는 해봤지.

박 이사람들 큰일 날 소리 하네.

당신들도 유명해지려고 그래.

그 노털상 후보처럼?

김 그래, 우린 역시 양보다는 질이지!

이박-!!

 

 


 

 

이동재 시인 / 장수시대

 

 

하루에도 골백번

양아치모드에서 효자모드로

잡년모드에서 효부모드로

 

아버님 어머님

오래오래 사셔요

 

하루에도 또 수백번

효자모드에서 양아치모드로

효부모드에서 잡년모드로

 

꼰대들이 쓸데없이

목숨만 길어져서 뭐해

 

 


 

 

이동재 시인 / 이런 젠장, 어머니

 

 

이런 젠장

막내아들 교수 만들고 큰 소리 좀 치려 했는데

교수 되지마자 해직되고

이런 젠장

며느리 앞에 기 좀 펴나 했는데

이런 젠장

염치없어 기도 못 펴고

이런 젠장

짜장면 하나도 입에 들어가는 거 죄스러워

이런 젠장

집 한편 구석에 찌그러져 구십 평생

이런 젠장

조상님 뵐 면목 없어 일찍 세상도 못 뜨고

이런 젠장

널 낳고 내가 미역국도 못 먹었다

이런 젠장

뭔 놈의 세상이 이 모양이냐

이런 젠장할

 

 


 

이동재 시인

1965년 경기 강화 교동도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8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07년 <정신과표현>소설 등단.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 『세상의 빈집』 『포르노 배우 문상기』 『분단시대의 사소한 너무나 사소한』 『주 다는 남자』 『이런 젠장 이런 것도 시가 되네』 등. 소설집 『파워 인터뷰』. 평론집 『침묵의 시와 소설의 수다』 현재 터키의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