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레 시인 / 나일악어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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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레 시인 / 나일악어
날 내려찍은 창들 다행히 피했지만 피하면서 부딪친 상처 다 낫지 않았다 나흘. 어떤 것이든 잡아야 한다 새끼들도 오래 굶었다
누 떼가 온다. 오랜 건기 저들도 우리가 있는 걸 알지만 목이 마르다 목마름은 두려움을 넘어서느니 큰 놈이 좋지만 내 몸 상태론 무리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죽는 건 문제없지만 아픈 아내와 새끼들은 문제다
좀 작은 놈을 물었다 발버둥치는 놈의 발굽이 내 등을 갈기지만 뼈가 으스러지도록 놈의 다리를 물고 끌어당긴다 기다리던 아내와 새끼들이 와 물어뜯기 시작하고. 포식은 못 되어도 다행, 새끼를 잃고서 날 바라보고 서 있는 저 커다란 눈망울들에게 미안 하지만, 다행 사는 건 다행이라는 징검다리 어디쯤 오래 살았다. 새끼들도 다 자라고 아내도 건강해지고 내 종족은 지금 내 나이보다 십 년쯤 더 살지만 난 여기까지, 큰 창이 가죽을 뚫고 들어와 있다 사력을 다해 가족을 떼어놓고 오는 데 성공한 것으로 감사한다. 뼛속을 후비는 창들에 뼈들이 부러지는 고통 만 지나면 끝이다. 행복한 생은 아니었으나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고 내 몫을, 잘은 아니어도 감당하고 가니 되었다
감기는 눈으로 들어온다 창을 던진 놈들의 배가 뒤집혔고 창을 던진 놈들도 사력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먼 옛날 인간의 마을에 삼손이란 자가 있었다 한다 다 되었다, 다음 생에는 누로 태어나리라
박이레 시인 / 서러운 그대들의 레지스탕스 -故 이미란(1962~2022) 시인을 추모하며
어떤 준비의 말을 하고 떠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법을 지상에 새기다 편안히 돌아누울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건 양구(楊口)에서 바라보던 눈과 인천에서 맞던 비의 차이는 무언가요 묻는 말처럼 모호하거나 뜬금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종종 외롭고 뻐근하던 세상을 커다란 눈망울로 바라보는 것과 과하게 말라 버렸거나 젖은 채인 가슴으로 늙어 가는 배우자와 아직 어린 아이들을 때론 어두운 거리에 홀로 선 자신을 끌어안는 일과 같은 것인지도요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던 모습을 기억해요 터벅터벅 걷던 발걸음과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얼굴 투박하면서도 솔직하게 하던 말들도 1990년대의 여름밤과 2000년대의 저녁 2010년대의 끝자락과 2020년대 초 어느 겨울밤의 기온들처럼, 기억해요
기억하지만, 난 적임자가 아니라고 말했죠 그런데 쓰고 있어요 쓰면서 생각해요 외로움에 대해서요 함께 모여 빛나는 은하 속 별들의 유구한 홀로됨과 갑작스런 사라짐에 대해서요 사람이란 이름으로 살다 사라지는 일에 대해
안간힘이겠죠, 시를 붙잡으려는 마음도요 오해가 많았던 삶이었다는 고백도 시만이 오롯한 내 연인이라고* 눌러 쓴 손마디의 처연한 힘도, 손가락마다에 깃든 엄마라는 의지와 아내라는 자각도요
올해 내려고 준비한다던 세 번째 시집은 큰 눈망울을 닮은 딸들과 동료들에게서 쓰이겠지요 아버지의 고독했던 안경과 외투에게 첫 시집을 바친** 부평 가는 심야버스, 대위의 오래된 딸처럼요
서러운 그대들의 레지스탕스가 되어 주겠지요*** 장마와 눈보라 속에서도 자라는 나무들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비추는 불면의 별들처럼
마지막 배웅의 밤이 끝이 아니라 생각해요 누군가는 또 당신을 안고 못 다 쓴 시의 숲에 들겠지요 준비된 말이 없어도요
*이미란의 두 번째 시집 '내 남자의 사랑법 '시인의 말' **첫 번째 시집 '준비된 말도 없이 나는 떠났다'의 自序 ***<내 남자의 사랑법> 중 '자화상'
박이레 시인 / 7월에 내리는 눈
눈이 내리지 7월의 하늘에선 그대에게 아직 닿지 않은 푸른 눈이 푸른 눈의 우크라이나 소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듯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두려움의 비늘들을 털어내 주듯이 송이눈으로 하늘 가득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네 바라보는 날 바라보는 일도 외롭지만은 않은 일 잡다한 일투성이 세상에서 외로운 것도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일인데 조루처럼 쉽게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하염없어라 하염없고 싶어라
눈이 내리지 7월의 하늘에선 그대에게 다녀온 저 맑은 눈망울들이 내 굽어진 어깨와 안개 낀 마음에 내리네 브레인 포그*를 덮고 우울증을 덮고 여기에서 치이고 저기에서 짓밟힌 마음을 타고 내리네 7월의 비가 아니라 눈이
다독이며 내리네 안녕의 옷소매를 덮으며 폭염 속에서 난 눈을 감네 눈의 온유와 용기를 보네
* 브레인 포그(brain fog): 안개(fog)가 낀 것처럼 머리(brain)가 맑지 않고 멍한 느 낌이 지속되는 상태. 이로 인해 집중력과 기억력, 주의력이 저하되고 인지 기능이 전반 적으로 저하되는 증상이 나타나며 어지러움, 피로감, 우울감이 생기기도 함. 코로나바 이러스감염증-19 감염자가 완치 후 경험하는 주요 후유증 중 하나라고 함.
박이레 시인 / 그녀와 바람과 바다와 나와
낭창낭창 기울던 그녀를 따라 저무는 시화호의 갈대를 따라 바람맞은 바람을 따라 기우는 내 마음 번지수 없는 마음의 강줄길 따라 생의 기울기를 바꾸는 페가수스 목 잘린 기억을 따라 기우는 별자리의 낭창낭창한 몸매 오 낭랑한, 목맨 그녀의 목소릴 타고 오는 편서풍의 날갤 달고 달려오는 고백들 오 다정했던, 백말 타고 내게로 오던 낙랑공주의 찰랑이는 속삭임을 타고 내리는 가랑비도 찰랑찰랑, 가랑비의 가랑이를 타고 내리는 토막 난 하나님 마음 그 마음 헤아리려 출렁이는 바다의 사타구니 속 난바다에 젖는 그녀의 눈동자와 그 위에 어리는 능청능청 그의 그림자 오 그림자, 그림자면서 그림자가 아니고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닌 우리 인생 그리고 그녀 혹은 흐미*의 바다와 나 바람의 헐벗은 이동 경로 그 젖었거나 마른 맨발들에게 이야해 이야해**
*khoomei: 몽골과 투바공화국 등에서 불려온 유목민들의 노래, 그들에 따르면 7 가지 음으로 되어있는 이 노래는 자연에서 나오는 산과 강, 바람, 동물 등의 소리를 표 현한 것으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성부를 동시에 내는데 회메이, 호메이, 후미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 속요 '상저가' 변용
박이레 시인 / 브레인 포그(brain fog)*
병명이 시적이군요 말하진 않았어요 그런 말은 얼마나 시답잖겠어요 환자가 밀린 의사 앞에서 환자로 앉아 있는 주제에
안개 낀 삶을 바라보아요 직장이란 밥그릇에 가정이란 침낭에 시간 사용과 대인 관계라는 거머리의 대가리 같은 것에서
아, 막힌 기도(氣道)를 틔어주는 기도(祈禱)와 기도 같거나 덜 빨린 팬티 같은 시와 글쓰기에서도
사방이 안개예요 주의보도 없이 거리와 건물과 관공서와 그곳에 들어앉은 이들과 우리의 대기 중에도
무기력과 혼란, 어눌과 우울을 앓는 병으로, 번아웃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노닥거리고 헐뜯고 드잡이하는 안개 혹은 안개들, 질기고도 질리는
인간이란 잡종들의 반성을 바라고 온 건지도 모르죠 코로나19인지 이구인지 짱구인지 바이러스는 웬만해선 퇴각하지 않아요 누군가는 방주를 지을지도 모르죠 노아처럼 소리치면서요 범람의 때가 온다고 빙하들도 녹아서 밀려온다고
브레인 포그는 시작이고 소사이어티 포그가 오고 있어요 이미 왔어요 사방에서 터지고 있잖아요 짓무른 목련 같은 것들이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탐욕들이
무쇠 바퀴를 단 안개 군단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지도 모르죠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자가 완치 후 경험하는 주요 후유증 중 하나라고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박이레 시인 / 세례수
새 음악이 흘러 새 길을 떠나는 너에게 다시 작업을 마친 나에게
영원한 안식의 문이 열릴 거야 이제 곧 열렸을 거야 보이지, 가봐
아늑하니 한우보다 더 정성껏 발골한 네 살과 뼈까지 곱게 가루로 날린 곳 흠 없는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려 분쇄기를 지나 불태워 보낸 그곳은
예수를 닮고자 한 너를 친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주었고 가시면류관도 씌워 주었으니 너는 영광되었으리 나도 그만큼 더 수고로웠으나
널 내려칠 때와 찌를 때의 감촉 나를 잊는 아, 나를 넘어서는 너도 나도 비로소 위대해지는 피와 땀이 흐르는 땅, 너와 나의 성지
네 소원대로 넌 희생양 나도 세상의 희생양, 이제 희생된 목숨들을 위한 세례수 같은 음악이 흘러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선 절뚝거렸어도 다신 절뚝거리지 않을 거다 열한 번째로 보내는 절름발이야
다시, 목뼈 부러진 눈송이들 날리고 널 환송하고 맞이하는 하얀음악 흐른다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중에서
박이레 시인 / 손톱과 기린을 위한 류트 협주곡 ― 홍재운의 시 「청동계단」을 변주하여
손톱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죠 유리잔은 미조술로 꾸민 손톱을 바라보고 손가락은 손톱을 이고 사느라 모자라게 자랐어요 손톱에 베인 짐승들의 감춰졌던 날개가 잔에 비쳐요 잘 익은 사과 향이 상처 쪽으로 흐르고 과일 향을 따라 목이 길어진 기린은 손을 잃고 말았어요
내 손은 무너진 협곡에 묻힌 노래 나무를 일으키다 닳았는지도 몰라요
눈을 떠 봐요 기린은 세상을 덮는 모자거나 아직 내리지 않은 눈물이거나 태양의 뺨을 어루만지는 벙어리 엄마의 손일지 몰라요 그림자였을까요 자작나무가 자작자작 걸어간 숲이거나 그물에 목이 감긴 고래가 울어요 노래 주머니를 차고 있는 꽃나무의 손을 따라간 적 있죠 손톱이 기린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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