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혁수 시인 / 에덴건강원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3. 18:31

권혁수 시인 / 에덴건강원

 

 

복수가 차올라

스테인리스 압력솥은 늘 둥글다

터질 듯 위태한 시간이 졸아들면

염소 울음 사라진 어둠이

시장 골목보다 검다

황달 아버지

에덴으로 걸려온 전화 받고

흙이 된 염소를 찾으러 간다

대물림 한 고삐를 칭칭 목에 감고

치러야할 생(生)의 잔금을 챙겨들고 간다

언덕뿐인 무인도

흑염소의 에덴

슬리퍼 신은 맨발로

간도 쓸개도 발톱도 없는

흑염소 한 마리 찾아 끌고 온다

매애매애

팩에 담긴 흑염소의 울음소리로

풀 없는 에덴

뒤돌아보지 않고

 

 


 

 

권혁수 시인 / 보이지 않는 길

 

 

야간 열차가 지나간 숲속 마을은 가로등 하나 갖고 있네요

 

가로등이 없는 마을은 별을 갖고 있네요

 

야간 열차는 별이 뜨지 않는 마을도 지나냐 한답니다

 

어두울수록 다정한 사람들

 

멀리, 아주 멀리 숨어사는 마을도 건너야 한답니다

 

버리지 못한 기억 하나 전하러

 

아직 마을을 출발하지 못한 당신을 위해

 

앞산 너머에 기적소리 숨겨 둘게요

 

 


 

 

권혁수 시인 / 갯벌

 

 

고무함지에 담긴 아이가 갯벌을 헤엄치며 논다

 

너무 넓어서 갈 곳이 없어진 아이

 

발가벗긴 아이를 갯벌 위에 올려놓은 여자가

갯벌을 뒤진다

 

생계의 검은 바닥, 그 깊은 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자의 호미질은

매섭게, 단호하다 허리를 펼 때마다

갯벌 위에 올라앉아 개흙이 되어가는

아이를 바라보고

밀물을 준비하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자신이 파 놓은 검은 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무릎으로 갯벌을 버티고 앉아 있는 여자의

보이지 않는 정강이가

갯벌에 주저앉아 혼자 노는 아이를 떠받치고 있다

 

자신을 꺼내기 위해 갯벌을 파헤치는,

날마다 썰물 진 젖가슴을 갯벌에 묻는

저 여자

 

등 뒤에 밀물이 다가서는 줄도 모르고

아이의 입에 젖을 물린다

 

 


 

 

권혁수 시인 / 지하철 벽화 속의 사슴

 

 

비 내리지 않고 눈말마저 날리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죠 흰 수염 산타크로스를

일 년 내내 기다리지만

 

알아요, 그도 이미 불쌍한 거리의 노인

먼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처음부터 고향이 없었거나, 아니면 소주 값으로

썰매마저 팔아치웠거나

 

지하인간들을 바라볼 때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러요

테라코타 눈에서 형광 빛 눈물이 나요

벽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사냥꾼의 화살이 쏟아져 꽂힌 듯한 자작나무

숲길 지나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지도 못하죠

 

그래요, 당신들의 문명은

내겐 너무 가혹한 형벌

나를 추월하는 무쇠 바퀴가 굴러가고

 

숲으로의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요동치는 굉음에 다시 갇혀요

 

언제부터인가

내 밖의 어둠으로만 반짝거리는

알레르기성 비염 코를 가진 내 이름, 기억하지요?

 

저, 루돌프에요

 

 


 

 

권혁수 시인 / 거미와 달

 

 

듣자니, 거미란 놈이 거리의 나뭇가지에다

미니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군요

 

손님을 기다리시는 모양인데

 

하루 종일 푸른 하늘을 배경화면으로 깔고

구름과 시원한 비바람을 실시간으로 서비스해도

파리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네요

 

아무래도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나

흘러간 팝송 같은 개울 물소리라도

메뉴판에 더 얹어놔야 할까봅니다

 

목이 길어 목마른 밤

 

달덩이 하나 덜렁 거미줄에 걸리자

허기진 녀석이 졸다 말고 덥석

마른 이빨로 꽉 깨물었네요 정신없이

엄마 젖 빨 듯 달빛 빨아대네요

 

저런!

하루하루 쭈그러드는 달이 안쓰럽네요

오는 그믐밤엔 당신

줄에 걸리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거든, 복권 사세요

행운이라도 혹은 불운이어도

걸리는 건 어차피 운이 아니던가요

 

 


 

 

권혁수 시인 / 어머니의 수레

 

 

칡넝쿨 같은 허리로 콩나물 수레 잡아끌고

앞길 가로막는 눈보라 입김 불어 녹이며

어머니는

골목을 걸어 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어두운 길 살피는데

비탈길에서 어머니의 발걸음이 잠시 흔들렸다

흔들려 기울어진 수레의

검은 플라스틱 시루 뚜껑이 열리고

시루 안에서 도시의 행복을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콩나물이

왈칵, 눈 쌓인 바닥에 쏟아졌다

 

불량 카세트테이프처럼 허공을 겉도는 수레바퀴

 

어머니는 쇠갈퀴 손으로

흩어진 콩나물을 쓸어 담았다

수레를 씌운 담요의 깃도 여며주고

미소도 한 겹 더 얹어 주었다

 

동네 구멍가게에 콩나물을 배달하는

어머니

최신 유행가 한 곡 부르지 못하지만

오늘도 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 음표를 찍었고

수레바퀴를 굴려

오선지 악보를 그려나갔다

 

굴곡진 생(生)의 악보

연주하듯 눈길을 밟아가는

수레바퀴

어머니보다 먼저 골목을 달려나가

도시를 흔들어 깨웠다

 

아침이 되도록 눈 뜨지 않는 도시

그 언저리

무명가수의 노래 한 곡 깊이 묻혔다

 

 


 

권혁수 시인

강원도 춘천시 출생. 강원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1981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과 2002년 계간 《미네르바》 시로 등단. 시집 『빵나무아래』 『얼룩말자전거』. 서울문화재단 2009 젊은예술가지원 선정. 2010년 현대시인작품상 수상.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급여조사실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