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바름 시인 / 아내에게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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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바름 시인 / 아내에게
마음이 너무 좁아 그대를 다 담을 수 없다 억지로 담으려 하니 이미 들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밖으로 밀려 나간다
사람이 크지 못하다고 푸념하는 아내여 넓다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넓기에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많이 부딪치고 많이 상처내고 많이 아파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담을 것 꼭꼭 담고 이미 담긴 것 지켜내는 실한 마음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정바름 시인 / 돌멩이를 던지며
흔하디흔하게 지천에 널렸어도 어디 눈길 한번 준 적이 있었던가
무심히 지나치다 비로소 손을 내밀면 다가와 될 만한 의미가 모두 되는 돌멩이는 말이 없다
길을 걷다가 한눈 파는 인생들을 탁 탁 걸어 넘어뜨리고
행주대첩 아낙네의 앞치마 속으로 다시 골리앗의 정수리를 내리꽂고도
그냥 버려지기를 구석기와 신석기를 가르기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지탱해온 근원이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당신과 나의 손에 던져지기 위하여
끝끝내 말을 감추는 그 돌멩이를 던진다
정바름 시인 / 눈물비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울고 싶다고 말하자 봄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그것이 눈물인 줄 알지 못했다
눈물 없이 살아온 인생이 어디 있으랴 태어난 순간부터 일평생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던 눈물의 굴레
어머니는 여전히 울지 않았지만 나는 봄비처럼 울었다
정바름 시인 / 미친 봄날 _1악장 엘레그로
맹학교, 찾아가는 음악회 비발디가 새순을 밀어냈다 빠른 속도로 色이 자라났다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생동하는 그 신비한 色의 향연에 대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봄날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숨겨진 色을 더듬었지만 나는 넘치는 色情을 감춰야 했다
정바름 시인 / 이명(耳鳴).1
조그만 씨눈에서 저리 큰 꿈 키웠는가 저녁상 술안주로 올라온 왕새우가 소금구이로 장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동안 허공은 파도처럼 요동쳤으나 아무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바다를 가르던 그의 꿈을 한입에 털어 넣고 우리는 기껏 자연산과 양식 새우의 격조를 논하여 서슴없이 모가지를 비틀고 껍질을 벗겨냈다
그의 이력을 송두리째 삼킨 날 그는 내 꿈길을 휘저었다 푸릇하던 감각의 가죽이 벗겨지고 귓속에선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살았을 적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죽은 왕새우의 울음소리가 우웅우우웅 귓전을 달구어 소금기 독한 망망대해에서 평형감각을 잃은 채 꿈,
표류하는 거였다
정바름 시인 / 이명(耳鳴).2
음원(音源)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밤 깊도록 울어댔다 평형을 잃은 몸은 사방 불빛 속으로 흩어졌다 어른들은 귓속에 귀뚜라미가 산다거나 낡을 만큼 낡은 세월이 여기저기 고장을 일으킨 거라 말하지만 이승에 오기 전 태초의 고향에서 들었던 아득한 소리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난 건지도 모른다 빛과 어둠이 나뉘기 전 창세(創世)의 거리에서 소용둘이치던 혼돈의 기억 때문에 나도 몰래 진동하는지도 모른다 떠나온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돌아갈 것을 아는 영혼의 흐느끼는 가을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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