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신 시인 / 거짓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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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신 시인 / 거짓말
어슷썰기를 했다, 지난 저녁을 도마 위로 흘러내린 채끝살의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매운맛이 돌았다모서리가 사라진 것들 감출 수 없는 기분을 게워내는 거울에 불길한 내가 붙었다 멀어진다
한참을 그림자로 출렁인다 하나둘 채워 넣은 감정은 이미 사선으로 가득찼다 그림자가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하나둘 경계를 넘는 사소한 기분들 낯선 얼굴들이 칼끝에 걸려 미끄러졌다 목젖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상점 밖의 단풍나무가 거리의 찬 공기를 뱉어낻다 헐벗은 마네킹이 딱딱한 어깨를 움칫거리고 거울에 붙은 입술 자국이 단풍처럼 붉게 번진다
언제나 그와는 행인의 얼굴로 마주 보게 된다 어깨에 내려앉은 담배 냄새가 굴렁쇠를 굴린다 그는 어딘가로 향해 초조한 표정으로 걷고
골목길이 막히면 애벌레 삼킨 유리병처럼 숨쉬기 힘들었다
쏟아진 빈 어항처럼 공기가 빠진 전면 거울 나는 너무 늦게까지 서울역에 앉아있었다
인파 속으로 소지하듯 숨어버린 얼굴 비밀은 유리의 단면처럼 뾰족하다
병이 병을 어루만진다
-시집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에서
김성신 시인 / 고통보다 빨리 달릴 순 없다
사라지는 것들이 구석구석 붙어있다
흔들리는 그림자를 바다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복도 그곳에 들어서면 생각이 길고 멀어진다 늘어선 슬픔이 빼곡히 들어찬 방들 흰색 페인트의 농담(濃淡)을 적막으로 덧칠한다
배웅한 사람과 마중 나올 사람은 다르지 않다 드문 일이지만 트럭에 숨어든 이민자처럼 오늘도 죽음이 죽음을 살려내지 못했다 손가락 안쪽에 그믐달 같은 티눈이 들어앉기 시작했다
겨울이 도착한다 유리창, 침대가 바늘 틈에 꽂힌 채 손이 묶여 있다 코로 이어진 식사 호스는 지하로 연결된다 복도는 조용하다 화살표는 얼마나 많은 의심이 뻗어 있나 오지 않을 날이 이미 와버린 것처럼 나의 물음표는 안과 밖의 모서리 흔들리는 물음이 사방에 널려 있다
눈물은 실패하지 않아요 병이 병을 어루만진다 복도에 버려져 까치발을 들고 있는 울음을 본다 병 속에 병이 같은 두께의 체온을 드러내도록 그 누구도 당신의 고통보다 빨리 달릴 순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바람이기도 했던 길, 약 없이도 수평으로 누워있는 당신 긴 바다가 출구 없는 둥근 시간이 된 채
천천히 유영하며 말을 걸어오는 난간이 흔들린다
끝이 만져지는 길
-시집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에서
김성신 시인 / 달팽이
상추쌈을 하다 달팽이를 봤다 된장을 묻히려다 보니 눈을 뜨고 웅크리며 합장했다
아뿔싸 허물만 부처인 내가 금빛 허우대를 세워 풍경소리 요란하게 듣고 상추 깃에 숨어 봄 한 철 도를 닦다 내 마음 시주받으러 온 너를 몰라봤구나!
긴 혀 침 튀기며 온몸 공글리는 설법을 꼼짝없이 듣겠구나!
김성신 시인 / 한 마리의 사과가 저녁의 옆구리를 찌른다
생을 마감한 유언들이 측면을 서성인다 밤을 솎아내 당신을 끌어내는 동안 산등성이에 초승달이 피었다, 졌다
사과는 늑대처럼 하울링 하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껍질 속에서 공벌레로 웅크리거나 보라매인 양 푸득푸득 홰를 친다
반포대교 난간 위, 추락주의 표지판 그 어떤 지문도 남기지 않는 한강변의 내일 폭설과 함께 사라질 당신의 표정을 본 적이 있지
사과는 얼굴과 다리가 붙어있다 달빛의 좌판이 천막을 길게 펼치는 저녁 흠집 난 사과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깨를 감싸 쥔다
골목의 바람은 주술을 외는 아가미 같아 기다리며 숨을 쉬고 손끝으로 노래를 듣게 되었지 적막의 껍질을 잇댄 슬픔은 둥글게 손을 맞잡는다
당신의 딱딱해진 간 오래전에 잘라낸 正午처럼 도무지 아픈 것들 사이로 차마 말하지 못한 미안하다는 말 여기저기 날개가 돋친다
사과 한 알을 건네면, 또 다른 사과들이 굴러들어 오고,
한 마리의 사과가 저녁의 옆구리를 찌른다
김성신 시인 / 말
두부 같은 집이었지, 바위처럼 단단한 집이었지
당신의 젖은 귀와 부르튼 입술을 생각해요 오체투지, 바닥에 낮게 엎디는 참례의 시간 맹금(猛禽)처럼 날 선 발톱이 풍경을 수습하고 비로소 내려앉은 마음들은 먼 곳을 바라보네
어제와 오늘 사이의 음소가 분절될 때 울적의 리듬은 박장대소와 굿거리장단에도 후렴을 맞추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한 묵음이 벽을 뚫고 울려 퍼지지
허공을 가로질러 바라보면 이 세상은 때로 질문들의 증명 먼 곳에 있는 것이, 가장 가까운 곳으로 숨 쉴 때 가로지르는 것이, 내 옆에 있었음으로 누군가 되물어도 입술을 깨물 뿐
말의 섬모는 부드럽지만 함부로 내뱉을수록 공허해져 끝은 뼈처럼 하얗구나 함부로 내뱉은 말들이 부유하는 소란의 세계 돌아나가던 命이 여기서 저기로 숨어들면
혀를 내밀어 숨겨진 말맛을 핥는다 음, 그늘진 속이 보일 땐 아늑하기까지 하군 오랫동안 놓지 못한 헛꿈이 측면으로 사라진다
굽이치는 강물에 작은 손바닥을 휘저으며 고립에 빠진 낯이 쉬웠다는 일기장 쓴다. 지난한 것들이 번져가는 달그림자를
무수한 별들 당신이 홀린 말에 박혀 차마, 혀를 빼내지 못한
그 사이의 사이
김성신 시인 / 모든 동물은 전복(顚覆)을 꿈꾼다
내 목소리를 따라오면 돼 아타카마사막으로 들어갑니다 여명을 찾는 지름길 틈새를 메우려는 적요 거기 근엄한 파수꾼, 굴절이 함께 있어
멈춰 서면 떠오르지 않는 집, 아무리 불러도 옆이 생기지 않는 어깨 혼잣말은 발걸음의 기원일까요 오늘과 나는 함께 몸을 말아 허공을 목소리로 키운다
절망은 어떤 질문 끝에 낙타와 조우 할 수 있을까 눈동자 속으로 몰아치는 먼지 구름 밤하늘에 꽂혀 있는 무수한 낱말들이 불려나오고 가깝고 많은, 시작에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를 바람에 휘말리기도 한다
시간의 비늘은 견고해 비탈을 달아 올린 날카로운 햇빛들 어떤 얼굴은 서 있을 곳 없어 자주 뒤집어져, 이마 헐고 발굽 가라앉는
헛짚던 채찍을 휘두르며 두 눈을 뜬 채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내디디며 걷는다 어떤 상처가 소용돌이 하나씩을 만들 때 발자국의 표면에 빼곡히 채워진 돌과 모래들
전복(顚覆)은 낙타보다 키 크고 둥 높은 동물 함부로, 죽어가던 내가 척추 세우며 올라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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