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영 시인 / 모자이크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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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시인 / 모자이크
모자가정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수급비가 끊기자 국밥 한 그릇 사먹을 돈이 없었다 아홉 살 아이는 식탐이 많았다 행복포차식당에서 두루치기로 일을 하고 눈만 붙였다가 등만 붙였다가 엉덩이만 붙였다가, 부업을 했다 아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땐 국밥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올까봐 야단을 쳤다 반쪽짜리 해를 보며 침을 삼키던 아이는 일찍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찢어진 날들을 붙이면 어떤 계절이 될까
내가 있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림이 된다고 했지만 인형 눈알을 붙이며 가까이 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희부옇게 보이는 내일, 아이의 슬픔이 가려지고 밀린 눈알 너머 조각조각, 조각조각 깍두기 먹는 소리가 들렸다
박은영 시인 / 멸종의 단계
쉬는 날,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에 갑니다 야생에선 멸종되었죠 고양잇과의 포유류가 철창 안에서도 사라진다면 호피가죽이 프랑스 경매에 오르겠죠 공장에선 모형장난감을 찍어내고요 호랑이 서식지였을 만한 곳을 선정해 테마파크가 조성되겠죠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들의 수순입니다 지금은 동물생태도감의 시대. 우리가 총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태백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거예요 호랑이가 물어갈지 모를 밤들이 꿈을 꾸게 했을지도, 강도나 바바리맨으로부터 안전했을지도, 누군가 미친 호랑이가 되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이제, 호랑이는 무섭지 않아요 연신 하품을 하며 야생의 기억을 잊어버린 자세로 요양을 합니다 산중호걸은 옛말이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을 거란 약속을 지킬 것처럼 순순합니다 철창 너머 하늘을 살기 없이 바라보다 누구시오? 눈만 끔벅거리죠
박은영 시인 / 비만
거울은 비좁은 공식
(덧셈은 쉬운데 뺄셈은 어렵다) 괄호 안의 식을 대입하며 숫자를 더한다 무게에 눌려 야식을 더하는 날엔 밤은 무한대로 흐르고 정육면체 치킨 무만 남는다
아침은 버릴 것인가
모든 문제는 죄다, 뺄셈으로 이뤄졌다 빼기를 못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 비 사이로 막 가는 당신은 나를 징그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스멀스멀 오늘의 정수에서 스물을 더하면 근의 공식 따윈 외우지 않아도 되겠지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거나 삼십 센티 자를 장롱 밑에 숨기지 않아도 되겠지
채점을 한다 나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무게인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거울에 비친 창밖은 같은 식으로
비만 내리고
박은영 시인 / 폐기물 집하장 가는 길
새벽 구로공단, 폐기물 쓰레기차가 녹슨 어둠을 수거한다 늙고 병들고 무능한 고철덩이들 며칠 전 신발공장 구 기계도 저 차에 올랐는데 가오리 등에 업혀 날아오르려는 꿈이 있었다지 나는 법을 잊어버린 가오리와 함께 오랜 세월 바닥을 기었다지 그 딱딱한 등에서 길잡이 새벽별을 보며 또 하루를 견뎌냈었다지 쓸모없는 이름이 되어 후미진 곳에 버려진 것들 집으로 가기엔 너무 먼 밤이면 가오리와 제2공단 사이 여인숙에서 쇳소리를 내며 제 살 깊숙이 기름칠을 하던 폐기물들 치워낸 바닥에서 이젠 낯선 기계음이 들린다 제 자리를 내어준 고철들이 녹물을 떨어뜨리며 공단을 빠져나가는 겨울 모든 길은 한곳으로 모여 매립 처리되고 다시 재생된 길은 새별별을 따라 구로공단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얀 기물器物이 쏟아져 내려 오그라드는 시간 아버지와 오빠와 형과 누이를 만나도 녹이 슬어 서로 알아볼 수 없는 길 가오리가 눈을 뜬다
박은영 시인 / 스카라베우스
길의 역사는 냄새로부터다 아버지, 말(言)의 배설물을 어디서부터 굴리고 왔나요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숱한 말의 세계 당신은 경단 같은 그림자 안쪽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배설하는 자들은 따로 있는 법, 가장 곤욕스런 길은 아버지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 날이었다 말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는 걸음에서 기하학적인 바람이 불었다 냄새의 각도에 따라 갈 길이 정해지는 시대 신화를 상속받은 가장들은 머리를 굴리고 눈동자를 글리고 바람 빠진 바 퀴를 굴려야 한다 둥글게 지나간 자리가 길이 되기까지, 아무렇게나 퍼질러 놓은 말들이 뭉쳐질 때까지 더부룩한 하루를 맞닥뜨려야 한다 돌아온 길이 양각의 주름으로 새겨진 아침 코끝에 붉은 인주 묻은 아버지가 대문을 나선다 가장 냄새나는 길을 골라 태양을 굴리고 간다
박은영 시인 / 달팽이집을 지읍시다
점점 작게 점점 작게
세상의 집은 작아졌죠 설계도는 필요 없어요 민달팽이 한 마리가 들어갈 만큼만 만들면 되거든요 집 없이도 살아갈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에겐 이 땅의 번지가 없죠 헐벗은 생을 가리는 가림막, 벽은 갈수록 얇아지고요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묻는 건, 분비물을 묻히는 일이에요 벌거숭이에게 세탁비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에요
오늘의 문제로부터 풀리지 않는 민달팽이세대, 연체延滯의 몸으로 바닥을 학습하는 그들은 쪽창 달빛으로 어둠을 풀어내고 가장 어려운 해법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채점을 마친 문제, 집엔 동선 없이 쉬이 지나간 풀이과정만 있을 거예요
고시원엔 고시생은 없고 고단한 시간과 생만 있는,
세상은 암기한대로 달팽이집을 짓고
점점 크게 점점 크게
고시촌의 태양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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