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영곤 시인 / 협주곡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21:22

김영곤 시인 / 협주곡

손은 감정을 숨기기에 좋은 악보다

부드러운 마술사의 손길에서

갑자기 음표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 팽팽하게 튕겨지던

보이지 않던 하트 카드 한 장

 

한 번도 붉은 리듬으로 발화하지 못했던

엇박의 첼로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음 이탈할까 봐 정박으로 죄어오는 다섯 손가락

기어이 오선지의 지붕을 뚫고

허공 높이 치솟아 오르는 하트 카드

 

지휘자조차 감상에 골몰해야 하는

바로 지금이 카덴차의 시간이다

오케스트라의 반주도 하나 없이

하트 카드는 자기만의 악기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연주해야 한다

손에 쥔 마지막 카드까지 다 잃어버리고

맥박 뛰는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전율과 떨림으로 껴안은 누군가의 목덜미

너무 왁자하게 울리느라

함께 팽글팽글 빨라지기 시작한다

 

 


 

 

김영곤 시인 / 상자의 중력

 

 

 블랙홀 같은 물류센터로 자진해서 빨려들어간 일용직들, 지역별로 하나씩 꽂힌다 차가운 컨베이어를 타고 상 자들이 빠른 보폭으로 행차하신다 펄떡이며 터질 듯이 우우우 쏟아져 나오는 상자 상자들, 쌓고 쌓고 아무리 쌓 아도 미어터지는 상자, 나를 놓쳐버린다 의식 한 귀퉁이가 닳아버린 일용직 상자, 손가락을 물어뜯긴다

 

 상자가 떨어진다 맨바닥에 철퍼덕 눈물이 부서진다 깨진 거울이 신음소릴 낸다 예리한 감정으로 손목을 긋는 상자도 있다 컨베이어 틈에 끼어 실핏줄이 터지고 생피 철철 흘리는 상자 끝내 몸이 으깨져버린 상자. 인간은 가장 고통과 결핍을 잘 느끼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짐승. 하지만 극한 고행보다 더 비참한 건 살처분 된다는 것. 나를 착취한다 불타버릴 때까지

 

 바깥은 첨단으로 풍요로워지는데 일용직 상자들도 갈수록 더 수두룩하다 손가락 하나 싹뚝 잘려나가는 것보 다 숟가락이 사라지는 것, 상자속으로 출근 못 하는 걸 더 두려워하니까 상자가 끝이 없듯 빈 상자도 끝이 없으 니까 상자에 서로 달라붙으려는 욕망은 영원하니까

 

-시집 <존재의 중력> 에서

 

 


 

 

김영곤 시인 / 어떤 광합성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

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깎아내다

제 몸을 보굿*에 끼워

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

한 번도 부화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

끝내는 해독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히고,

 

저 왔어요 한 줌의 말 광합성이 되는 걸까

핏기 잃은 가지에서 붉은피톨 감돌 때

고집 센 심장박동기

뿌리째 팽팽해지는,

 

무척산에 옮겨 심은 우듬지 저류에서

썩지 않는 후회가 시간의 뺨 데우며

절단된 둘째손가락

단풍 빛깔로 손 흔드는,

 

*보굿: 나무껍질의 순우리말.

 

-202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김영곤 시인 / 땅속의 하늘

 

 

나무들은 땅속을 하늘이라 부른다

하늘만큼이나 드넓은 하늘 땅속에서

바다 속 만큼이나 깊은 땅속의 바다에서

희망의 회한을 버리지 않는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더 많은

땅속의 정기들이

칠흑에서 숨을 죽인 채

창조의 가슴으로 푸른 꿈을 칼금 재우고 있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나무들의 하늘은

터질 듯 미어질 듯 끓어오르는 꿈들은

하늘 속 지하수에서 새 샘물로 솟아난다

 

새 생명을 창조하는 땅속 하늘의

거룩한 원리를 본다

창조의 파릇한 돌기를 본다

따뜻한 보듬의 온기를 본다

 

높푸른 하늘은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싱그러움이 가득하지만

땅속의 하늘은

있는 그대로 진실만을  보여 준다

 

참된 꿈 심은 대로 거두는 하늘

나무들의 하늘에서 나는 호흡을 한다

갈수 없는 하늘 바라 마시며

땅속 하늘에서 흥건하게 하늘을 캐내고 있다

 

 


 

 

김영곤 시인 / 여름 코스모스2

 

 

바지랑대 넘는 키를 키웠어

매미 울음소리 혼절하듯 들렸어

빨간 하얀 분홍 햇살 화장이 분에 넘쳤어

하늘하늘 줄기줄기 잎잎 포개어

그리움 한 아름 안고 꿈을 피워 올렸어

피우디 피우다 못다핀 나머지는

가을 소녀 몫으로 남겨 두었어

아리도록 인사하는 한들한들 고운 눈매

안으로는 청아함 참고 견디는

무언으로 말을 하는 다순한 결정체 였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 위하여 허리 휘어 본적 있는가>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 위하여 목늘리는 가위에도 웃음질 수 있는가>

아량의 흔들림으로 말을 하는 코스모스

눈에 베일 정도로 흐드러졌어

 


 

김영곤 시인

경북 청도에서 출생. 배재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계간 『포지션』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 『둥근 바깥』 『존재의 중력』과 논문집 『최문자 시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가 있음. 배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