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주 시인 / 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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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주 시인 / 문
문 앞에 서라. 바로 서라. 씨발 러마. 저기 맨발로 선 아이가 니 새끼냐. 데려 오라. 나란히 옆으로 서라. 어쩔래, 문을 열래. 나하고 좀 더 있을래. 괭이 내려놔라. 낫도 땅에 놓고, 생각해 봐라. 문 밖에도 별 것 없어. 벌판 끝엔 하얀 뼈다귀들만 보일 거다. 문은 한 번 여닫으면 영 열리지 않아. 허리띠도 풀어라. 내 꺼야. 그 아이도 두고 가라. 그놈도 너의 것이 아니야. 인상 쓰지 마라. 법대로 하는 거다. 죽은 계집도 너의 것이 아니었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문은 한 번 밖에 열리지 않는다. 보릿대 모자하고 베잠방이는 가져가도 좋다. 울지 말고 생각해봐라
-시집 <의심하고 있구나> 에서
이정주 시인 / 방을 보여주다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책들을 버려야지. 불태워 버려야지. 내 얼굴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싱크대에 그릇들이 넘쳐나 있었다. 혼자 자취하는 모양이네. 우리 딸도 혼자 살아요. 그러나 걔는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아. 짐들도 버려야지. 모두 갖다 버려야지. 나는 양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네. 노파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 그럼. 도시가스 들어오고 방도 따뜻하대요. 영감은 신발을 꿰며 소리쳤다. 노파는 내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갈려고 그러시오? 나는 한참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손날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다. 먼 데로 가려고 합니다. 먼 데로? 노파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노파도 같이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현관이 멀어지고 나도 뒤로 엄청 물러나 있었다. 노파는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아득해진 공간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멀리 현관 밖에서 영감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이정주 시인 / 댄스 파티
파티가 익어가면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하네 모든 여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네 내가 찾던 여자는 보이지 않네 커다란 호박이 갈라지며 여자가 나타나네 맨발로 나타나네 첫눈에 나는 아네 구두의 주인이라는 것을 여자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나에게 발을 내미네 여자의 발에는 혈관이 무성하네 나는 여자의 발에 구두를 신기네 꼭 맞아요, 꼭 맞아요! 여자는 유리구두를 신고 제 자리에서 맴도네 내 맘도 잠시 따라 도네 나는 여자와 춤을 추네 내 마음은 조금씩 어두워지네 그건 깨어지는 거야 여자는 신이 나서 춤을 추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네 여자의 눈에서 안약이 떨어지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네 여자의 허리를 기둥처럼 끌어안고 나는 눈을 감네 내 눈에서도 눈물이 밀려나오네 음악은 매우 빨라지네 여자의 구두가 깨어지네 여자의 발바닥이 찢어지네 여자는 모르네 기뻐서 울며 춤추기만 하네 유리조각 질펀한 핏물 위에서 여자와 나는 눈물 흘리며 밤늦도록 춤추고 있네
이정주 시인 / 좋은 소식
핸드폰이 울린다 가스불을 끄고 주방에서 거실까지 가는 동안 핸드폰이 끊어진다 번호가 남는다 그냥 주방으로 돌아간다
핸드폰이 울린다 면도 거품 묻은 채로 욕실을 나오다가 물기에 미끄러져 비틀거린다 핸드폰이 끊어진다 번호가 남는다 그냥 욕실로 돌아간다
책상 앞에 앉는다 모르는 번호들을 지운다 알고 있다 좋은 소식은 자주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젖은 발로 뛰어간다 뛰어가다가 뒤집어진다 뒤집힌 채로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간다
베란다 바닥에 핸드폰을 눕히고 망치를 들어 내려치려다 만다 아직은 좋은 소식이 남아 있을 것이다
- 2015년 <애지> 봄호
이정주 시인 / 색色
소파가 앉아 있다
시흥 갯골 홍수 지던 날 흙탕물에 쓸려가던 소파 위에 여자 하나 소래 앞바다서 사라졌네 그날 밤, 만조 때 소파 혼자 달빛에 밀려 올라왔네
갯벌 위에 소파가 앉아 있다
어둠이 균등해지면 보지털 노란 여자가 알몸으로 소파에 앉는다 여자는 담배를 피우며 식어간다 여자의 얼굴은 돌이다 여자의 웃음은 균열이다 균열 사이로 해가 뜨고 새들이 날아간다 여자는 풍화된다
갯벌 위에 소파가 앉아 있다
소파는 이제 역사가 두렵지 않다
《시인수첩》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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