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성원 시인 / 고온다습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21:44

정성원 시인 / 고온다습

 

 

 나는 예민한 고양이, 그러므로 날씨 따라 변하는 내 감정에 민감하지 말라는 말씀 어이없는 표정도 금물 나는 예민한 고양이라니, 정오의 햇빛을 뭉칩니다 햇빛 실뭉치는 날카로운 심장을 가졌죠 눈이 부신 고양이가 눈치를 보아요 고양이가 빠져나간 자리에 다른 고양이, 낯선 오늘은 표정을 가지지 않았어요

 

 새벽에 받은 통보는 폭염, 여름이 겨냥한 총구는 얼굴이 여럿이죠 나는 무표정해져요 이런 나를 일반적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 부르는군요 새벽이 보내온 통보를 기별로 바꾸어봅니다 그러하면 간간 여우비 혹은 국지성 호우가 되려나요 그럼에도 고양이는 고양이, 이제부터 진지하게 얘길 나눠볼까 봐요

 

 커피 내리는 고양이가 있어요 커피 향은 초콜릿이거나 초원의 지붕 냄새, 아니다, 신맛에 가까워요 새벽에게 이상한 기류가 감지됐던 건 코피루왁 때문이었나 봐, 발밑을 따라다니는 고양이가 말을 해요 빌어먹을 고양이 저쪽으로 가라니까

 

소파와 딱 붙은 고양이는 꼰대예요 걸핏하면 밥 내놔라 물 내놔라 쓰다 달다 지적질에 잔소리, 자기가 무슨 인간이라도 된 줄, 어쩌면 소파와 몸이 일체란 걸 먼저 알아낸 고양이가 사람 종족이었을지 모를 일

 

 제발 진지해져 볼까 봐요 커피 향으로 가득한 집, 공기가 가볍군요 한가로움이에요 보는 눈 이 없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네요 고양이는 꼬리를 부풀려요 앞치마를 두르고 앞발을 세우고, 몸을 최대한 낮춰요 등은 동그랗게 더 동그랗게 그리고 점핑!

 

 세렝게티 초원인가 봐요 나는 야생으로 돌아가요 내 질서가 있는 방향으로 해가 뜨고 별이 뜨고 세계의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흘러가요 고요하게 치열하게

 

 에어컨을 켜요 해양성 고기압이 성급히 달아나요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초원을 달리는 고양이, 그 곁을 지나는 고양이가 오늘의 날씨를 닮아가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정성원 시인 / 2월 1일

 

 

배꼽을 들여다보면 말린 세상이 보인다

 

계절 모르고 피는 꽃과 방향을 비트는 바람

어제 꾸다 접어둔 꿈이 구석에 구겨져 있고

 

말린 세상을 다시 풀면

꽃이 울음 우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빠지지

생김새와 색감으로

어쩌면 파괴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멀리서 건너온 꽃일수록

태양의 뜨거운 속삭임을 오래 기억하지

 

우리는 더욱 곡진해지고

 

하나둘 모여드는 풍경과

마주하는 얼굴들

 

서로의 얼굴을 섞으며

새로운 얼굴이 생겨나는 걸 본다

앵초꽃이 피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처음인 것처럼 환하게 눈물 흘리며

그런 날이 백일몽 같아서

꽃은 무더기로 진다

 

배꼽을 들여다보면 태곳적 울음이 고여있다

그해 눈 한 번 뜨지 못한 아이의 옹알이와

함께 보았던 첫눈

까마득한 눈길까지

 

 


 

 

정성원 시인 / 기다림

 

 

 육손이는 뒷짐을 지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그 애 아비는 용왕의 재물이었고 어미는 바람을 종착역 삼아 떠났다 할미는 물질을 잘하고 누구보다 굴을 빨리 깠다 껍질째 눌어붙은 바다가 몇 겹의 상처로 담겼다 파도를 겹겹이 장독에 재워놓으면 아비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렸다

 

 빨간 대야에 바지락을 풀어 놓고 한나절을 기다리면

 바지락으로 쏟아지는 햇볕의 흥성거림

 

 할머니 집 시렁에는 찐 고구마와 감자가 바구니에 걸려 있었다 가을볕에선 옥수수가 말라가고 석석하게 익은 홍시와 꿀에 절인 유자와 매실이 창고에 넘쳤다 먼 산에서 새끼 고라니 울음이 굽이굽이 사무치면 천년 침묵이 흐르는 골 깊은 산

 

 훠이훠이

 이야기는 깊은 산 어느 봉우리에서 괜찮다 잠이 들고

 낡은 집에 비바람이 숨어든 날

 물질하고 오지 않은 할미를 기다리다 까무룩 졸음을 깨무는 육손이

 군불 지피는 소리가 잠결에 들리고 갓 삶은 고둥 냄새가 집 안에 퍼지면

 

 새로 든 햇볕이 시렁에 걸려 살을 찌우고 있었다

 

 


 

 

정성원 시인 / 어떤 것도 없는 11월

 

 

 딱히 기다리지 않았는데 기다렸나 봐요 어쩌면 꿈에서 보았을지 모를 일이고요 현몽쌍룡기를 머리 밑에 둔 까닭일지 모르겠어요 어젯밤엔 바람이 방향을 틀더군요 구름이 한쪽으로 쏠리는 걸 보았 어요 꿈인 듯 아닌 듯 가을이 깊어요 지금쯤 산 이마에선 나무가 잎을 떨구기 시작했을까요 고운 색 옷을 입고 다음 생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자각몽에서 나무가 악몽을 달고 있는 걸 보았어요 자각 자각, 바쿠가 악몽을 먹는 동안 나무는 같은 색 옷을 입고 같은 색 옷을 벗겠지요 한생이 이렇게 간 다는 건 빛나는 일이겠어요 다음 생을 기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이 되겠어요 옆 동네 해지개 마을 가 로수 잎이 차례로 시드는 걸 보면서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를 착각하지 않기 위해 메모를 했어 요 비로소 알겠어요 너무 닮아서 착각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요 특징을 가진 고유성에 대해서요 그리고 여름이 왜 흔적 없이 사라졌는지를 생각합니다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던 사람은 애초에 없 었고요 하필 그때 그 말이 떠올랐던 건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어른인 척하고 싶었던 때문일 거예요 내일은 없어요 어른이로 보이고 싶지 않은 내가 내일을 기다려도 된다는 다짐을 하는 거예 요 어느 쪽이든 목을 늘이면 내 걸음이 없는 내일을 향하게 될 거예요

 

 


 

정성원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20년《시산맥》으로 등단. 제15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글도리깨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