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소희 시인 / 무화(無花)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21:56

김소희 시인 / 무화(無花)

 

 

길고 긴 장마 끝에 서 있지요

레인 부츠를 신으면 머무르는 일보다 떠나는 일이 더 힘들죠

작고 반들거리는 흰 돌이라든지

호기심 가득한 인디언 페인트 브러쉬의 속눈썹, 누군가 데려갈 우산까지도

몸을 드러낸 기슭은 다 끌어안고 있지요

빗물 들이치는 창가에, 꽃 없이도 꽃인 아이들

순한 옆모습이 위태롭게 흘러내리고

나는 쪼아 먹힌 과육 아래로 혀를 밀어 넣죠

당신은 뭉개지는 자줏빛 예측을 익지 않은 계절 속으로 내던집니다

발목 잠기는 장화 하나 신고 있을 뿐인데

폐허,

이별보다 더 허우적거리는 단어가 둥둥 떠내려오는 내전(內戰)의 한낮

무너지는 내부를 훔쳐보는 사람들은

글자 하나 없이 흘러간 노트를 믿지 않고, 나는 볼품없는 문장들로 넓어진 하류를

이브의 잎사귀로 가립니다

이곳을 걸어 나가면 우리의 발목은 다시 길어질까요

불분명한 절기 당신과 나의 입맞춤에선 어떤 소리가 날까요

미아가 된 지형은 조용합니다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김소희 시인 / 프랙탈의 시간

 

 

나무가 앞만 보고 서 있어서

문을 닫고 뒤돌아 가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안다

 

초록을 전염시키는 그 나무 곁에서

긴 선으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감지한다

 

늦은 오후의 얇아지는 공기는

긴 여정이었다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소근댄다

 

문을 흔들고 떠나간 새는

점으로 쪼개지는 시간을 옮기다 떨어뜨릴 것 같은

 

발자국 없는 시장에서

 

흰 손수건의 한쪽 면으로 언 발목을 덮어주고

날마다 접힌 날개를 쓰다듬던

습한 그늘이 사라지는 시간 속

 

새 모양의 장식을 머리에 인 전설 같은 남자에게

나의 젖은 발을 내밀며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큰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문이 나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비좁은 문이 다시 열리는 그곳에

 

나는 아직 거기 있어요

 

빨려 들어가는 나뭇잎 사이

새의 날개에서 공기처럼 반짝이는 일몰이

밤을 건너온 일출일 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김소희 시인

미국 시애틀에 거주. 2018년 미주 《중앙일보》 신인상, 2020년 계간《시산맥》등단. 시집 『비커가 있는 오후』. 제1회 해외동주신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