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용진 시인(마산) / 께나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22:27

박용진 시인(마산) / 께나

 

 

바람이 당신의 살점을 뜯어 가고 나면

푸른 지네들 사그락거리는 뼈만 남으면

잘 마른 정강이뼈에 구멍을 뚫어

바람 부는 날 불겠다 그때

당신의 망각처럼 꽃이 피면

 

온 바람 속에 당신이

 

다른 높이로 떠 있다

 

 


 

 

박용진 시인(마산) / 처음에 대한 이야기

 

 

 들어 보세요. 제가 사랑한 아버지가 옛날에 여기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그를 뒤덮고 있는 나비들만 보이는 것이어서 그 아래 아직도 아버지가 계신지는 알 수 없지만 느린 날갯짓 위로 그가 창조한 수많은 얼굴들이 그저 오고 가는 것인데 그것이 또 참 좋고 슬픈 것입니다.

 

 “그 면면이라는 것은 웃고 있는 사기꾼, 사기꾼이 발명한 사랑, 사랑이 모욕한 불쾌함, 불쾌함이 유감스러워한 바람, 바람이 난해해하던 녹록함, 녹록함이 낡은 거리에서 발견한 수염 같은 것들.”

 

 제가 사랑한 아버지다운 바람, 바람이 전한 붉은 비밀, 붉은 비밀처럼 저는 수염들을 악보 위로 주워 모아 보는 것인데

 

 “한평생 해몽을 해 온 습관이 그녀의 출생을 음모한 것이다.”

 

 수염이 낳았다는 아버지의 얼굴이 조각조각 맞춰지는 듯도 합니다. 또 언젠가 그가 제 가슴을 도려내 던져 버린 날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저는 우리 아기 가슴뼈로 만든 새장 속에 아직도 앉아서 안아 주지도 못하고 팔을 뻗어 볼 뿐일 것인데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은 손안에 품어 보지 못한 꿈.”

 

 오래 그의 꿈을 먹고 통통해진 나비들이 떼 지어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시간은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표면을 가진 탓에 아버지의 꿈, 그 마지막을 보지 못하였으니 가련함이란 이제 누구의 것인가?”

 

 내 아버지, 그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만든 것이 나비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 얼굴 속에 사는 유령들은 녹아내린 꿈에 젖어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제가 나비를 건드려 얼굴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잠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부정할 것이다. 잡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 계절에.”

 

 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만든 것이 결국 아버지가 되어 버린 아기들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혀를 잘라 늪 속에 빠뜨렸고 그것이 처음으로 고래가 되었고 고래는 늪을 돌아다니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그 속에 낳기 시작했다. 거미가 꿈을 물어다 아기들에게 먹였고 아기들은 귀엽게 살이 올라갔고 아기들이 꿈을 꾸며 싼 배설물들이 그림자가 되었다.”

 

 “아니다. 새장 속에서 꾸물꾸물 그녀는 흘러내려 그림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림자는 남자를 낳았고 남자는 늑대를 키웠고 늑대는 밤을 배설해 냈고 밤은 혀로써 사랑하는 법을 남자에게 가르쳤다. 그 와중에 늑대의 배설물 속에서 아기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아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결코 잔인하지 않을 손가락으로 집어 꾸욱 눌러 터뜨리고 또 꾸욱 눌러 터뜨려 버리곤 했지요. 그러나 살아남는 그림자 하나쯤은 어떤 이야기에든 있기 마련입니다.

 

 “거기서 피어난 아픈 꽃은.”

 

 처음으로 말이라는 것을 한 것은 아버지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꽃을 예쁘게 키워 그 안의 씨들을 뿌리기 시작했던 것이어서 최초의 말은 사기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은 사랑, 그다음은 불쾌해, 그다음은 바람, 그 다음은 녹록해,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 수염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그것은 수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녀의 무성한 콧수염을 보라. 아버지는 지상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것이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낡은 거리만큼 오래 아버지가 보입니다. 저거 보이지요? 지금 저 아버지에게서 흩어져 나와 늪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저 무수한 뱀들을 보세요. 지금 딱 좆만 하게 말라비틀어져 있는, 내가 사랑한, 저 아버지를 보세요. 나비 한 마리가 달 위에 내려앉는데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가 제게 주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수염, 굵은 수염

 

 


 

박용진 시인(마산)

1982년 경남 마산 출생. 2006년 《서정시학》 여름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미궁>. 현재 서울에서 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