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 시인 / 해질녘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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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국 시인 / 해질녘
우두커니 마루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저녁을 맞습니다 싸리 비질로 깨끗하게 쓸린 마당 귀퉁이, 유독 빛나는 돌멩이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두 손으로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볼을 감싸기도 하다가 조금은 쓸쓸해진 이 저녁에 내가 해야 될 일은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걸레를 빨아 방과 마루를 닦고 들에 나간 식구들이 오기 전에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일 말고도 멀리서도 그 불 볼 수 있게 마루에 등을 켜놓는 일, 밤이 더 깊고 깊어서 찬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남이 뭐래도 그 불을 끄지 않겠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물소리가 생각나면 얼른 맨발로라도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서 물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나 떨어지고 그리워했으며 사랑했던 일들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바람이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대체 뭘 했는지 잎이 사각거리는 소리로는 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오다가, 밭둑을 건너서 오다가, 남은 무씨 몇 줌 실수로 흘린다 해도 상수리나무 상수리 알이 익어 여무는 것으로 넉넉하고 또 넉넉하겠습니다
-시집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에서
김명국 시인 / 자전거
자전거를 하나 갖고 싶다 차를 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비웃을지 모르지만 바퀴와 페달만 괜잖다면 브레이크만 이상 없다면 헌 자전거라도 상관없으리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얼굴이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눈이 노루처럼 선한 긴 생머리의 여자라면 더욱 좋겠다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그 여자가 사는 마을길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이 늘어간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 수도 있으리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참 하늘빛이 곱고도 맑은 그녀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써서 책갈피에 꽂아두는 날도 생기게 되리 멀리서 본 그 여자, 복숭아꽃을 닮은 여자 새참 때 미리 맞춰 광주리 머리에 이고 논둑길 따라 걸어가는 들꽃 이름을 나보다도 더 많이 아는 여자 갈수록 보리가 푸르러갈 때 저문 마을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가 지나간다면 빨랫줄에 널어둔 마른 빨래를 개며 앉아서도 들길이 훤히 다 내다보이는 툇마루에서 그 여자 무슨 생각을 할까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유채꽃밭에서 유채를 꺾어먹던 시절부터 당신을 좋아했노라고, 편지에 쓸 수는 없으리 나비가 훨훨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당신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소쩍새 우는 밤하늘에 은하수 별이 되고 싶다고 분홍색 편지지에 적을 수는 없으리 그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다 짐받이 뒤에 그녀를 태우고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갈 수만 있다면 구름이 뭉실뭉실한 산마루 언덕까지라도 다 달려가고 싶지만 산죽밭 끼고 강물 돌아 흐르는 물가까지 가서 소풍처럼 그녀와 점심을 먹으리라 이것이 내 평화라고, 유토피아라고 강물에다 대고 물수제비를 띄우며 까르르, 소리 지를 수도 있으리 자전거를 하나 갖고 싶다 그녀가 살던 옛집 마당에도 살구꽃 피고 달빛 환하게 감꽃이 털리는 밤, 어디든 달려갔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 멈출 수 있는, 안마당에 괴어 놓은 자전거 한 대가 바로 나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명국 시인 / 마음속의 집
집을 한 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박눈 내리기 전에 얼른 집을 한 채 지어, 이 비좁고 추운 방에서 새집으로 이삿짐을 옮겨야겠다고
집은 흙과 나무와 짚으로 된 집이었으면 합니다 딱따구리 파다만 구멍이 그대로 남았거나 옹이가 무늬처럼 박힌 통나무집을 상상했지요 깔끔한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헛간도 한 채 새로 지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뒤꼍에는 하루 종일 새들이 지저귀다 가는 대숲이 있었으면 합니다
책 읽기가 싫증이 나면 대밭길을 걸어 소나무가 있는 오솔길을 지나 동그란 무덤들이 놓여 있는 산정(山頂)으로 오를 수 있게. 마른 솔잎이 푹석푹석 깔려 있다면 절로 시는 흥얼거려지는 것이겠지요
탱자나무 울타리를 빙 둘러서서 해마다 탱자꽃이 피면 내가 좋아했던 한 여자, 기막혔던 연애를 떠올리며 화로처럼 귓불까지 달아올라도 부끄럽지 않을 텐데요 그런 곳에서 나도 내 이름으로 된 문패를 걸고 찾아오는 사람 하나 귀찮게 생각하지 않고 유자차를 끓여내놓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올 때는 댓돌 위에 가지런히 신발 돌려놓고 시 쓰는 이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참입니다 작년보다 올해는 더 살기 어려워졌다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어떻게 살 작정이냐고
목화송이처럼 또 함박눈이 내릴 때면 그런 이야기들은 다 눈 속에 파묻어두고 나도 이 세상 어딘가 단 한사람 시린 등이라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이었으면 합니다
김명국 시인 / 장독대
누님에게는 풍뎅이 한 마리를 잡아주고 싶었다. 쉰 냄새 나게 반나절 구멍만 파던 상수리나무 삭정이에 숨어 버린 딱정벌레 생선가지 마루나무 깔깔한 잎사귀마다 햇살로 부서지던 어린 시절 내 꿈은 감꽃을 꿰어 누님 목에 걸어 주고 싶었다. 풍뎅이는 끝내 날아가 버렸다. 익을 대로 익어 버린 누님의 생각처럼 불어터진 석류가 아프게 몸을 쪼개고 갈라진 고요 속 숨 쉬는 자국들을 남기며 붉게 물든 감잎이 떨어져 내렸다. 숨 가쁜 그리움인 듯 억새가 하얗게 서서 마른 침을 삼켰다. 골방 칠이 벗겨진 거울 화장대 앞에서 감잎의 입술을 발라 화사해진 누님이 누우셨던 지난 밤 때 묻은 베갯머리에 흩어진 머리카락 한 올 짚어내지 못하고 강물은 그렇게 깊어가던 것을 말없이 돌아와 눈을 감으신 속눈썹 짙은 낮달 가을날은 저물어 누님의 입술처럼 붉은 감잎 한 장 뒤란 장독대에 떨어져 내렸다.
김명국 시인 / 서울가는 소포
올해 싸고 풍년 든 게 과일이라 단감 한 박스 오천 원씩 한다는데 아직 그것도 모르고 계셨남, 선산 아짐 아침 드시고 우리 집에 일찌감치 오셔서 박스 하나 구해가시네. 아들 종태하고 손자 놈들 먹으라고 서울까지 갈 것이니 밑도안 터지고 짱짱해야 쓴다고, 나는, 단감 한 박스에 오천 원 한다는데 부치는 삯이 더 들지 않겠냐, 부치는 것보다야 서울에서 사 먹는 것이 더 낫겠다 속으로 생각하지만, 아무 말 못하고 쳐다만 보네. 그래도 고향 뒷산 언덕배기 감나무에서 딴 단감이니 각별하지 않겠냐면서, 소포 받는 날 저녁 아홉시 뉴스 끝나고 뭐 하러 보냈냐고 아들네가 얻어 듣는 소리라도 하면 어떡하나. 지금쯤 선산아재는 아들 종태가 적어놓은 쪽지를 들여다보며 추석날 내려 와서 놓고 간 손자 놈의 윗도리와 터질 새라 싸고 또 싼 깨 봉지까지 넣어 초등학생같이 보내는 쪽 주소는 작게 알아보게만 쓰고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를 큼지막하게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쓰고 계실 것이네. 행여나 중간에 풀리지 않게 노끈도 여러 번 감아 힘을 주어 꽉, 묶어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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