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진심 시인 / 느티나무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11:58

이진심 시인 / 느티나무

 

 

이제 정오의 태양이

느티나무의 어깨에서 조금 몸을 내려 놓는다

느티나무의 그림자가 가벼워진다

 

차츰 느티나무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검정외투

한 벌이 땅바닥에 펼쳐진다

돌돌 말린 검정 도화지 한 장이

천천히 펼쳐지는 것 같은

 

그러니 주위가 조용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소리란 소리는 다 먹어버린 것 같은

침묵이

커다란 느티나무의 근심 아래 조용히 몸을 구부린다

 

외투가 다 펼쳐지는 서너 시경 ,

느티나무는 몸 속을 다 빠져나온 제 그림자를

쉬지않고 들여다본다

 

서서히 햇빛이 스러지자

그 주위의 나무들도

자신의 외투를 다시 조그맣게 개켜

가슴 속 서랍에 밀어 넣는다

 

전전긍긍,

나무들은 외투를 도둑 맞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어떤 날은 너무 서둘러

서랍 밖으로 빠져 나온 외투의 끝자락이

늦게까지 남의 눈에 띄는 날도 있다

 

여름날, 느티나무는

외투를 잡아당기는 햇빛과 싸우느라고

길어진 가지를 하늘로 치켜든다

 

어떤 날은 하늘이

쭈욱 당겨져 느티나무 허리까지 내려 오기도 한다

 


 

이진심 시인 / Crazy Love

 

 

 당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그 위에 유리가루를 뿌리고 피가 벽에 튀도록 잔인하고 비밀스런 섹스를 하지요 당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목에 스타킹을 감은 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쾌락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고 공포에 휩싸여 오줌을 갈길 때까지 섹스가 끝나면 음악을 틀고 나는 당신 머리통에 권총을 겨누죠 나는 그런 년이죠 생각도 시간도 필요 없이 그냥 사랑을 나누는 거죠 당신 속으로 파고 들어가 당신만을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아무리 더듬어도 완벽한 테크닉이란 없죠 무언가 알맹이가 빠져 있는 것 같지요 시원한 물을 아무리 마셔도 없어지지 않는 갈증처럼 나는 갈수록 더 사나워지는 거죠 미치지 않고 어떻게 사랑 할 수 있나요 나의 사랑이란 색깔의 숨통을 끊어놓는 염소계 표백제와 같아서 갈수록 색은 엷어지고 지독한 냄새만이 남지요 그래도 멈출 수가 없어요 사랑이란 미친 듯이 하는 거지요 죽을 듯이, 숨통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시집 <불타버린 집>(2002년 포엠토피아)

 

 


 

 

이진심 시인 / 사라진 밍크이불

 

 

그 시절, 어지간한 집엔

장롱마다 그 놈이 살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려 해도

꼭 어딘가 한 군데는 주름져 있던

털이 여러 군데로 쓸려져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던,

가을철에 장롱에서 기어 내려와

겨울 지나 봄까지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어지는 법 없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또르르 또르르

몇 년이 지나도 빨지 않아

털이 송곳처럼 딱딱해지던 밍크이불,

말뿐인 밍크이불

한번 물을 먹으면 너무 무거워

빨랫줄에 걸 수 없었던 짐승,

장사하는 엄마 따라 시장에 나가

한겨울 사과를 덮다가 배추를 덮다가

털갈이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밍크이불,

너무 순해서 내 동생 같았던

진짜 밍크 같았던

 

 


 

 

이진심 시인 / 천장天葬

 

 

지금도 티베트에서는 天葬이라는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

 

죽은 이는

나무상자나 푸대에 담긴 채

집안에서 삼일 정도 안치된 뒤

가족들이나 친지들에 의해 황량한 고산지대로 실려간다

주검을 다루는 천장사는

제일 먼저 옷을 벗겨 독수리들이 뜯어먹기 좋게

시체 피부에 칼집을 넣는다

독수리들은 시체의 살점을 즐겨 먹기 때문에

시체들의 살점이 남아 있는 법은 드물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천장사는 다시 시체의 피부 가죽을 잘라내고

창자와 갈비뼈를 일일이 손으로 들어내

독수리들이 먹기 좋게 놓아둔다

남은 뼈는

돌판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을 하여

모래처럼 으깨어 남은 살점과 함께 뿌려진다

다만 시신의 일부인 무릎뼈나 어깨뼈가 가족에게 전해진다

이것은 집으로 옮겨져 49일 동안 모셔지는데

환생을 믿기 때문이란다

 

고산지대라 화장할 나무도 없고

너무 건조해 썩지도 않는 시신을 매장할 수도 없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새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시신의 살점이 더 깨끗하게 발라질수록 좋은 징조라 믿는다

 

천장사들이 시체의 일부인 손이나 살점이 붙은 두개골을

망치로 내려치는 시진을 보면서

죽음과 한 집에 동거하는

죽음이 한 몸에 엉겨있는 샴 쌍둥이를 본다

 

눈물도 없이 지켜보는 가족들,

죽음이 너무 뻔뻔하다고

생이 너무 야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늙은이들,

두려운 것은

하늘을 뒤덮는 검은 구름 같은 독수리도

내장을 꺼내 던지는 피투성이 천장사도 아니고

광활한 천지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먼지,

그들이 들이마시고 다시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들이 마셔질 그들의 생,

그들의 붉은 생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이 입 벌려 먹고 노래할 때마다

침처럼 고이고 흘러내릴

아주 작은 그러나 아주 거대한 먼지

 

-시집 <불타버린 집>에서

 

 


 

 

이진심 시인 / 서서 먹는 밥

 

 

너무 바빠 서서 밥 먹으며 살았다

여물을 집어삼키는 가축처럼

온순하게 이 삶을 씹어 삼켰다

잘 씹히지 않는 밥을 먹을 때도 두 눈을 감았다

고작 서서 밥 먹으려고

하루를 일생처럼 견뎌 내었다

대항하지 않고 투정부리지 않고

찬물에 밥을 말아 씹지 않고 삼켰다

무릎을 끓으면

뒤에서 들소 떼가 땅을 뒤집으며 달려왔다

누가 나를 게으르게 먹고 있다

내 등에 흐르는 것은 땀이 아니라 침이다

꿀꺽 삼키지 않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빨아들이는

보아 구렁이 같은 삶,

이 느린 식사에 나는 공손히 바쳐지고 있다

이 공손함 마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바칠 것이 없다

너무 바빠 서서 밥 먹으며 살았다

나는 잘못 한 것이 없다

너무 오래 견딘 잘못 밖에 나는 없다

 

- 시집 <맛있는 시집>에서

 

 


 

이진심 시인

1966년 인천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11회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불타버린 집 > <맛있는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