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윤 시인 / 지워진 길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12:02

임윤 시인 / 지워진 길

 

 

아이가 엄마손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 끝에 묻어난 계절이 안간힘 쓸 때

강물로 뛰어든 정강이가 시릴 즈음

단단한 각질 벗겨내는 물결처럼

잡목이 삼켜버린 길 위에 포개진 발자국은 침묵한다

강의 어깨를 물고

끝 간 데 없이 출렁거리는 국경

모래밭에 찍힌 화살표 물새 발자국이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던 편자의 깊이 같다

봉두난발 백성들 머리카락인가

반질거리던 길을 에워싼 잡초를 헤집는 바람

 

신의주가 손에 잡힐 듯 끊어진 철교

수풍댐 가르는 보트의 굉음

집안에서 만포 구리광산으로 연결된 교각

증강진악산과 사행천에 자리한 너와집들

혜산의 얼굴을 차단한 세관의 철문

남백두에서 발원한 강물을 건너던 길

보천, 삼지연, 송강하, 이도백하 그리고 천지

대홍단 감자 보따리장수와

화룡을 오가던 무산의 얼굴

용정과 회령을 건너던 독립투사들

두만강 뱃사공은 파업 중인가

남양으로 건너야 할 기찻길 장악한 중국 국경수비대

훈춘 302호 지방도로 철망 뚫고

아오지, 나진, 선봉으로 향하는 덤프트럭

동해가 손에 잡힐 듯한 녹둔도

금방이라도 연해주를 향한 증기기차가 건널 것만 같은

독립을 위해

식솔들 먹여살리기 위해

매캐한 석탄 연기 속, 졸음에 겨운 눈꺼풀 부릅뜨고

가슴속에 댓 개씩 응어리진 한 품고 건넜을

방천에서 바라본 두만강 철교

 

정오의 태양은 정적으로 떠다니고

왁자하게 강을 건너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철망사이 바라보는 건너편

인기척은 없고 매미 소리만 요란하다

미루나무 그늘에 위장한 초소들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에 숨소리조차 숨죽이는

아이가 엄마 손 놓쳐버린 계절

비명으로 흩어져 떠내려가는 노을처럼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발자국들

장마철에 떠내려온 비닐봉지가

철조망 송곳니에 걸려

갈 곳 먹먹한 가슴들이 파르르 떤다

 

시야에서 사라진 엄마의 손

두려움 떨치려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으면 좋겠다

꼬질한 손가락 사이 까만 눈동자

오늘밤은 어느 방향으로 비틀거릴까

압록과 두만이 펼쳐놓은

창백한 푸른 점* 먼지처럼 서글픈 반도의 둘레길

 

*창백한 푸른 점: 보이저가 찍은 지구의 모습에서 빌려옴

 

-시집 < 지워진 길>에서

 

 


 

 

임윤 시인 /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

 

 

황사먼지 사라진 화창한 봄은

도시의 눈동자를 지평선까지 열어놓았다

상승 기류를 타고 순조롭던 비행기가

바다 위에서 부러질 것만 같은 날개를 파닥거린다

모든 뼈를 대나무처럼 비워내도

유체 속에서는 다들 비틀거리고 말 것인가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위태한 항로는

추락과 상승을 번갈아 롤러코스트를 탄다

안전벨트 매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기내방송에

나는 빠삐용을 생각한다

폐쇄된 공간을 뛰쳐나갈 수만 있다면

수백 미터의 허공에서 자유낙하라도 하고 싶다

한 치 앞도 구분치 못할 막장구름을 통과하면서

불안한 마음도 덩달아 요동쳤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힐끔거리는 바다

시간이 멈춘 하늘에서 해무 짙은 해변을 보았다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사랑은 빛의 속도로 왔다가

트랩을 내려서면서 빛의 속도로 달아났다

멈췄던 시간을 찾으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검색했다

산둥반도부터 하늘을 건너는 동안 맹골수도에서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라는 문자들이

균형을 잃어버린 수면 위로 수없이 피어올라 있었다

폐쇄된 유리창에 가득 핀 서리꽃처럼

서정이 죽어버린 시간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가

 

-시집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에서

 


 

임윤 시인 / 바닷길 족적

 

 

쿵쿵거리는 엔진의 진동수 뒤척이며 헤아리다

난바다 출렁거렸을 난파선 생각하다가

항로 없이 어둔 바다 헤쳐 간 황해도 작은 어촌의 고깃배를 떠올린다

희부연 새벽, 꿈에 나타난 무지개는 혼자만의 비밀

천연색 꿈이라니, 발해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홍채, 선홍빛 물결은 덤일까?

회색 왜가리 날개 같은 단동

유민들이 건넜을 붉은 빛의 요녕 끝자락

밤을 꼬박 샌 여객선은 항으로 미끄러지고 푸릇한 새벽이 선창에 붙어 인사를 보낸다

인천항에서 승선한 덩치 큰 보따리들, 철조망의 굴레에 바다에서 절반의 생을 살아가는 장사꾼들

비단섬의 볼모로 잡힌 굴뚝에 휘감긴 회오리바람, 물거품 물고 몰려드는 난바다의 파도, 폭풍 지난 뒤의 평온이 더 두려운 겨울, 이순이 된 지금도 귀가 뚫리지 않는다

거무죽죽한 입술의 둔치를 지나치면, 계절의 윤회 속에 잔뼈 굵은 자작나무, 잿빛 우울한 날 강변에 찍힌 발자국이 서글프다

무작정 대륙으로 흩어진 채 잃어버린 국적

오가지 못할, 발자국 하나

발자국 둘, 발자국 여럿

무성한 계절 속에서 목숨 걸고 서성대는 사람들

 

 


 

 

임윤 시인 / 압록강에는 섬이 많다

 

 

귓불 화끈거리는 봄의 입술

삭정이 흔들며 서성대다

철책 너머로 사라지는 강바람

콘크리트 현수교에 흐르는 정적을 쓸어

비단섬 하류로 몰아치는 황사 먼지

갯벌에 발목 잡힌 폐선 한 척

하구로 닿은 바닷길 한없이 더듬어 가는가

손 내민 훈풍에도 인기척 없다

 

눈부셔, 실눈이 부시다

수면의 빛을 깨뜨려 국경 넘나드는 갯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어디인가

철조망 너머 깨진 빛 조각이 흘러간 곳인가

부시다, 부셔 내린다

건너편 강가에서 들려오던 빨랫방망이 소리

목메도록 불러도 대답 않던

어적도 아주머니는 보이질 않고

봄은 다시 강물 위에서 눈부시다

 

끊어진 길 배경으로 섬은 정물화가 되었다

물결 위 쏟아지는 물감들

신의주 관광에 이백 달러라는 호객꾼

강 건너면 국보법에 종북이 될 터

씁쓸한 웃음만 날린다

경고인 듯 가슴에 인공기 배지 단 처녀들

아득히 숨죽여 바라보는 건너편

들쭉술에 쌉쌀한 대동강 맥주

먹먹한 가슴으로 살얼음 시린 평양냉면을 먹는다

 

잡목이 앙상하게 날리는 모래언덕

단동에서 평양 오가는 조선족 보따리장수

이레쯤 돌아온다는 소식만 남겼다

조선 한국 민속 거리

숨죽이던 탈북자들은 어디서 섬이 되었나

가슴 뚫린 벽돌집 유리창

케케묵은 먼지만 봄볕에 얼굴을 내민다

바싹 마른 손가락 비벼대는 옥수숫대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살가운 바람

 

유초도, 위화도, 다지도

둑방 길이 허공에 꿈틀거린다

물결 따라 흐르는 아이들 웃음

연암이 건너왔을 강변엔 물비늘 반짝인다

박작성 위에 세워진 호산장성

고구려 병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성루 건너편 초소에도 아지랑이 피고

눈부셔 마냥 바라보는 여울 살

길은 끊이지 않고 출렁대기에

부신 길 부여잡고 더 북쪽으로 떠나야겠다

 

 


 

 

임윤 시인 / 절망의 틈새

 

 

문영 형과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살펴야 먹고사는

권력에 빌붙어 활개 치는 세상을 이야기하며

대낮부터 술 마시는 날이 잦았다

눈과 귀를 막아야 속 뒤집어지지 않는다며

막걸리 주전자를 탕탕 내려치기도 했다

그러던 형이

눈동자 초점이 흐리고 황달중세가 왔다

술만 마시면 구토증세가 심해지던 날

형은 배를 움켜잡고 병원을 두드렸다

복개 수술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병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말에 형수는

“얼매나 쪼리가 살았는지 간이 말라붙었다 카네 예"

어찌 술 때문이겠냐만

간을 절반이나 잘라내고 쓸개도 떼어냈단다

그나마 간은 조금씩 재생된다니 다행이란다

봄 햇살이 비치는 창을 배경으로

침대에 누운 형의 몰골은 사나웠다

술 그만 마시고

마음 편하게 몸조리 잘하라는 말에

부스스 일어나 싱긋 웃으며

"나는 간도 쓸개도 없는 놈이다”

 

 


 

 

임윤 시인 / 이도백하에 내리는 눈

 

 

기차 바퀴는 눈보라 가르며 절룩댔다

먹먹한 가슴 덜컹대며

압록강 혈류 따라

구불구불 닿은 이도백하

어스름에 몇 남은 봉창의 등불에 이끌려

조선족 식당이란 미닫이를 민다

집 나간 한족 며느리 대신

어눌한 모국어 발음의 손녀딸이 음식을 나른다

된장찌개가 반갑고

짜디짠 김치가 달다

노파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지만

젖먹이 때 만주로 이주해온 뒤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단다

서울 어디선가 막노동한다는

아들 소식은 묘연하단다

키보다 한 뼘쯤 짧은 뒷방에 누우니

맨발이 문턱에 걸린다

새우등으로 웅크린 이도백하의 겨울밤

소나무에 소복한 컹컹 개 짖는 소리

우지직 부러지는 가지에 관절이 시리다

눈발에 묻어온 차가운 얼굴들이

밤새도록 봉창으로 날아들었다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사, 2011)

 

 


 

임윤 시인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울산에서 성장. 울산대학교 졸업, 1990년대 연어사업으로 러시아 사할린과 쿠릴열도, 중국 등지를 10여 년간 주유. 2007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 『서리꽃은 왜 유리창에 피는가』.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