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소영 시인 / 천변길에서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12:38

송소영 시인 / 천변길에서

 

 

앞서 가는 그림자 목이 실낱 같다

 

꺾일 듯이 흔들흔들, 문득 이는 유혹 하나

 

가볍게 툭 꺾어, 저 생을 끝낼 수는 없을까

 

이승은 늘 그림자거늘 또 욕망을 마음에 담는다

 

 


 

 

송소영 시인 / 방장 부처를 찾습니다

​​

 

밤새 빗속이다

숨이 턱턱 막혀 견딜 수가 없다

 

천지분간 못 하고 그만 보도블록 위로 기어 나왔다

 

힘겹게 긴 숨을 토해내고

기지개를 편 것도 잠시

어느새

따갑게 비추는 햇살에 시시각각 수분이 빠지며

소리 없이 몸이 마른다

가여웠던지 누군가 마른 가지 주워, 애써

날 들어 올려 풀숲으로 던진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나는

다시 기어 나온다 햇살이 내리쬔다

어리석은 육체는

바늘로 찔러대는 머리통을 결국 불섶에 디밀었다

 

아! 장군죽비 번쩍 들어

어리석은 지렁이 탁 후려쳐 줄 방장 부처는

어디에 없는가.

 


 

송소영 시인 / 이제는

 

 

개천가를 걷는다

비둘기 서너 마리가 보도블록 산책로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다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쳐 가도

전혀 개의치 않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한다

요즘 TV 드라마에선 남녀 주인공이

충동구매로 구입한 사랑들을

몸에 맞지 않는다고 줄이려고 또 불리려고

언성을 높이고 다투며 야단법석을 떠는데

두터운 시간 속에서 석화된 내 사랑은

그들과 달리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타성에 젖어 각자는 그저 돌아서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천변의 비둘기처럼

줄이고 불리는 걸 감당하기엔 이제

너무 여윈 시간일까

 

 


 

 

송소영 시인 / 에티오피아의 바람

 

 

커피전문점 바리스타가 건네준

커피콩 한줌이 우리 집에 와

세 개가 발아했다

 

그중, 한그루는

거실 오른쪽 구석에서 푸르른 잎을

무성히 달고

보란듯이 서있다

귀를기울이면 목동 '칼디'*가 들던

에티오피아 고원의 바람소리

 

6.25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병사들

체리커피 향내 진한 고향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7년의 가뭄으로 아내의 젖가슴에선

궁핍이 발화했지만

그래도 격정의 시큼한 바람은 불었었다

 

찻잔을 받쳐든 발효된 내 기억속으로

아직 설볶아진 육십여 년을 핸드드립 한다

시간이 스쳐가는 사악한 검은향내 속으로

오늘도

메마른 에티오피아의 바람이 분다

 

*칼디: 커피 열매의 효능을 이슬람교도들에게 알린 전설의 에티오피아 목동소년

 

 


 

 

송소영 시인 / 표류도

 

 

정처 없이 떠돌던 섬 하나

내게로 와서 모래톱이 되었다

 

하루 종일

파도가 몰려왔다 몰려가며

더욱 더 단단해지곤 하는데

단단한 모래땅 밑으로

가끔씩 지열이 끓는 줄도 모르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듯 숨구멍조차 막혀갔다

드디어 멱차오른 마그마는

의식도 못한 채 분출되어 한순간에

모래톱을 뻥 뚫어버렸다

 

다시 표류하는 섬 하나

내 가슴에 가시처럼 걸렸다

 

 


 

 

송소영 시인 / 그저 묵언이다

 

 

그저 걷는다

닿을 수 없는 이데아 곁을 한 번씩 맴돌며

때로는 첼로가락을 붙잡고

단조의 아카펠라도 붙잡고

자욱하게 골안개 낀 들판을 붙잡기도 한다

 

그저 또 걷는다

행여 한 번 만날까 풀어진 신발끈을 꽉 조여 매며

트로트를 흥얼대고

통속한 가슴속에 슬픔을 낙하하고

짙은 가지색 제비꽃에 뻗정다리가 된 목도 돌리며

되돌아온다

 

이제 찻잔을 앞에 놓고 그저 묵언이다

시들병이 도지고 숨쉬는 소리도 버거운 오늘 하루는

 

 


 

송소영 시인

1955년 대전에서 출생. 공주교대 국어교육학과을 졸업, 율현초등 30년 교직 생활. 2009년 《문학·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의 존재』. 수원문학 젊은작가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현재 수원문학 편집장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