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실리아 시인 / 첫사랑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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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실리아 시인 / 첫사랑
첫사랑은 순금과도 같아서 숱한 세월에도 퇴색되는 법 없고 곤궁할수록 진가를 더한다
세상 어떤 마음이 이토록 소슬바람 한 자락에도 놀라 파르르 떠는 아기새의 가슴 같을까 수천수만의 문장을 짓고도 끝끝내 열리지 않는 말문 같을까
긴 밤 뒤척임 응답 없는 화살기도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고 누구에게나 영구한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죄 없는 맹목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에서
손세실리아 시인 / 귀머거리 연가
혼수상태가 열흘을 넘어서자 산소 호흡기는 부착보다 제거가 못할 짓이니 애당초 숙고하라는 조언과 죽음이야말로 존중받아 마땅한 권리라는 고견이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코에 흘려 넣고 줄줄 세는 대소변을 수발하다가 엎질러진 등잔불에 화상 위중했던 유년으로 회귀한다 목숨 건사하기도 힘드니 그쯤 해두라는 수군거림 아랑곳 않고 귀머거리처럼 표정도 대꾸도 없이 벌겋게 익어 까무러진 여식 들춰 업고 용하다는 의원 쫓아다니며 치성드리듯 백약 바르고 먹여 사람 꼴로 되살린 엄마 혼자서는 먹지도 뒤척이지도 못하는 전생의 딸을 위해 이제는 내 귀가 절벽강산이 될 차례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에서
손세실리아 시인 / 문전성시
해안가 마을 길에 찻집을 차린 지 달포 발길 뜸하리란 예상 뒤엎고 성업이다 좀먹어 심하게 얽은 가시나무 탁자 몇 좀처럼 빌 틈 없다 만석이다
기별없는 당신을 대신해 떼로 몰려와 종일 죽치다 가는
눈먼 보리숭어 귀 밝은 방게 남방노랑나비
-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 2014)
손세실리아 시인 / 바닷가 늙은 집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수만 평이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시집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 2014)
손세실리아 시인 / 장단마을 김씨
턱밑까지 차 오른 거친 숨과 반쯤은 풀려버린 날갯죽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아비 새가 자꾸만 뒤처지는 어린 것 평지에 야멸치게 부려 놓고 그렁그렁 눈물 매단 채 北으로 北으로 갈 길 재촉하던 날, 가을걷이 끝난 논밭에 나가 몇 됫박 서리태와 한 말은 족히 되고도 남을 벼이삭 따위 나그네새와 떠돌이새 몫으로 흩뿌려놓고 돌아서던 김씨 눈에 겁에 질려 할딱이는 목숨 하나 쑥 들어오더랍니다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해 집으로 데려와 자식 돌보듯 하는데요 이런 일 처음이 아니었던지 참다 못한 할멈 작정하고 퍼붓더랍니다 노망났냐고
피난통에 헤어진 처자식 때문이라고 누군가 배부르고 등 따습게 나 대신 거둬줬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죽을 때 눈 편히 감고 싶어서라고
손세실리아 시인 / 나를 울린 마라토너
다시 태어나도 아빠와 결혼하겠느냐는 아이의 질문에 한참을 묵묵... 하다가 다른 건 몰라도 너랑은 만나고 싶어 에둘러 답했더니 자긴 안 된다며 난감해 한다 이유인즉 이십여 년 전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있는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우승 부상이 엄마인 이유로 필사적 질주 끝에 월계관은 썼지만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숨이 차고 무릎도 써금써금하다며 이런 몸으로 재출전은 무리라 너스레다 만일 선두자릴 내주기라도 한다면 그땐 엄마와는 남남일거 아니냐 장난삼아 낄낄대다가 돌연 정색하더니 그럴 바엔 차라리 지구별에 다시 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며 끝내 눈물바람이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고백에 울컥해져 이 풍진 세상에 여자의 몸으로 와 여자를 낳은 일이야말로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이라고 다만 속으로 속으로만 되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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