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신병은 시인 / 곁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5. 13:02

신병은 시인 / 곁

 

 

늦가을 꽃의 마알간 낯바닥을

한참을 쪼그려 앉아 본다

벌들이 날아든 흔적은 없고

햇살과 바람만이 드나든 흔적이 숭숭하다

퇴적된 가루 분분한 홀몸에 눈길이 가고

나도 혼자라는 생각이 정수리에 꼼지락대는 순간,

꽃 속 꽃이 내어준 자리에 뛰어 들었다

혼자 고요한 꽃은,

누군가 뛰어든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꽃은

순간 화들짝 놀랐지만

나도 저도 이내 맑아졌다.

곁이리라

화엄華嚴이리라

 

 


 

 

신병은 시인 / 어머니의 양식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후에야

어머니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창창하던 분이 기운 없어 보이는 것이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는가 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했던 게지요.

어머니는 지금 남아있는 몇 개 목소리로 견디는가 봅니다

가끔 드리는 전화 한통으로 사나흘을 견디곤 하지만

목소리도 유효기간이 있어

전화로 하는 목소리, 얼굴로 하는 목소리,

장남이 전하는 목소리, 동생이 전하는 목소리의

약발이 각기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유효기간이 제일 긴 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달리한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빛깔로 기억 속에 남아

함께 저물어 가고 있는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단번에 눈에 빛이 나며

'그럼, 니 아버지는 그랬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도 따웁니다

오늘 아침 한통의 전화에

어머니의 하루가 탱탱해지면 좋겠습니다

 


 

신병은 시인 / 동백꽃

 

 

놓아버린 순간에 저를 한 번 더 피웁니다

툭툭툭 저를 버리고 세상 편하게 드러누운 저 꽃들의 고요한 웃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이 지는 것을 다시 꽃 피웁니다.

 

순간이 천년인 꽃,

천년을 꽃피우는 사랑입니다

 

 


 

 

신병은 시인 / 꽃, 그 이후2

 

 

꽃의 그녀,

꽃 이전의 꽃이면서 꽃 이후의 꽃이다

 

시간의 포즈 시간의 눈빛 시간의 화법이다

좋은 날이면 으레 꽃이 피었다

 

꽃의 그녀 앞에 선다

꽃, 그녀는 집중의 패션(passion)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독백이며

자신과의 외로움을 비집고 들어가는 질문이다

 

똑하고 물방울 하나로 웅크린 생명의 촉수를 세운다

잎이 피고 혈맥이 돋아 원형의 시간이 싹튼다

 

깊게 더 깊게 숨을 죽인다

꽃, 그녀가 오브랩된다

 

은밀한 숨소리와 미세한 떨림,

그녀 안 물과 불 어둠과 빛이 출렁댄다

 


 

 

신병은 시인 / 톡과 talk

 

 

살랑살랑 바람이 불자 모과 한 알이 떨어졌죠

오래 바라보던 눈길도 그렇고

서로에게 할 말이 참 많지만

한생을 건너는 소리는 딱 한 음절의 깊이죠

때 되어 남긴 거침없는 소리죠

나무에게는 폭발음이지만 아프지 않죠

바람이 그 소리를 재빨리 보듬어 주죠

그러고 보면 마음이 마음을 건너는 소리죠

모든 게 한 순간이죠

피는 것도 놓아버리는 것도 한 순간이죠

한낱 뜬구름 같아도

놓아버린 나무는 참 홀가분하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순응이죠

오랜 묵언수행 끝에 남긴

톡,

먼 데서도 가깝게 들리는 참 맑은 폭발음이죠

떨어지면서 날아오르는 몸 가벼운 소리죠

 

 


 

 

신병은 시인 / 그녀의 적막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가 사는 여수의 소호 바다 같았어

잠방잠방 물결을 밀치자 거미줄처럼 걸려있던 달빛이 이마를 붙잡았어

오래 된 적막에 걸린 시간을 털어내느라 화들짝 흔들렸어.

고택에도 윤슬이 일었어

 

생각해보니 속내 끈끈한 그녀 생의 이력은 온통 적막의 성장통 이었던 것 같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길드는 것이라는 그녀의 전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잔물결로 가장자리를 맴돌았어

그래서 더 아릿하게 다가온 기억을 툭툭 털어내지 못했어

 

생각해보니 그녀의 풍경은 적막의 그늘이었어

눈만 잠시 마주쳐도 허공으로 오르던 그녀의 말은 꼬리 긴 적막이었어

못다한 말들이 처마 밑 혼잣말로 바래어도

언제나 뒷배 든든한 배경이어서 나는 그녀 적막의 그늘 아래서 반짝였어

 

생각해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적막의 그늘이 그녀의 생전生前이 있어

껐다가 다시 컨 그녀, 오랜만에 빛났어

나는 또 잠시 부풀어 올랐어

 

 


 

신병은 시인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및 동 대학권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1989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바람과 함께 풀잎이』 『꿈의 포장지를 찢어내며』 『강건너 풀의 잠』 『바람 굽는 법』 『잠깐 조는 사이』 『키스』. 시화집 『2+1』. 『휴』. 한국문인협회여수지부장 및 한국예총여수지회장 외 활동. 여수정보과학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