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아 시인 / 맏이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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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아 시인 / 맏이
이가 몽땅 부러지는 밤 부러진 이를 입안 가득 물고 있는 꿈 다 잃은 것 같고 다 가진 것 같은 순간 가지런한 말들이 똑똑 부러져 입안을 할퀴는 잠 고인 침이 목구멍으로 달아난다 나에게 들키지 않고 혹은 내가 짐짓 외면한
이불 속에서 입안에서 와글대는 하소연들 엎어진 퍼즐같이 되었지만 아직 혼날 순 없답니다 좀 더 근사하면 좋았겠지만 이 꼴을 보며 유감이지만 만에 하나 잃어버린 조각이 있다면 그곳엔 꽃을 심을게요
커다란 문처럼 정원을 지키는 두 앞니 치열을 읽는 게 혀의 취미라서 교정은 할수록 어렵다고 사전에 치치카카 잇새에 꽃이 피었다는 설화
백색은색 접착제로 밤새 부러진 잇조각들을 붙이니 또 하룻밤이 입을 앙다문다
집을 나서 내가 웃으면 실금이 간 이들이 덩달아 와글대고
어쩌다 그 틈을 비집어 꽃 한 송이 내비치는 날도 있었다
- 2016년 <시와 문화> 봄호
지현아 시인 / 넌 어디에 있니
여름에 신발은 문밖에 두고서 들어온 고양이가 있었다 나는 왜 자꾸만 이곳으로 올까요 되려 물으며 밥을 먹고 맞춘 눈을 아래에서부터 부풀려 감았다 뜨는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가 종이피아노를 연주한다고 했던가 골판지를 내어주자 열중하던 네가 잠이 들었을 때 작은 몸에서 들리던 소리와 진동이 종이피아노와 닮았더라는 기억 흰 배 검은 얼룩에 손을 얹고 너는 이제 고양이피아노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고양이가 오지 않던 날이면 배앓이를 했다 창을 등지고 누워 빗소리도 종이피아노를 닮았다는 생각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창밖이 잘 보이지 않는 날에 내 마음은 더 잘 보였고 네가 오지 않는 날이 늘어나며 계절이 바뀌었다 지난 여름 너를 몰랐는데 다음 여름의 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도둑고양이의 마음일까 내가 길고양이가 지나간 길이었대도 할 수 없지 우리는 여름을 살았고 우리의 여름은 지났고 길 위에서 고등어나 치즈 같은 야옹 혹은 안녕처럼 이름이 아닌 이름들을 부르는 동안 네가 오지 않을 여름이 왔다
지현아 시인 / 작은 주체와 작은 대상들의 이야기
머리카락이 움큼 빠졌다 쓰다 만 글자처럼 보인다 글자가 되지 못한 선들이 바닥을 누른다 현재를 고정한다 다음 바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바닥 내가 사는 피부*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 받침이 없는 말 파도 소리 낙엽 쓰는 소리가 들린다 물을 빼앗긴 잎은 소리를 가진다 창문을 열면 무언가 타고 남은 재가 날린다 열차가 지나가자 쇠맛이 난다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편지 멀리 떠난 사람이 두고 간 피부 만질 수 있는 눈이 얼마 전 떠나간 사람들의 뼈가 내린다 *영화 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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