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종무 시인 / 미라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6. 21:42

최종무 시인 / 미라

 

 

1

재활용 처리장에서 사 온 책상

녹슨 경첩을 문 자물쇠가 아직도 단단하다

서랍 속엔 얼마나 오래 된 시간이 갇혀 있을까

경첩을 떼어내고 손잡이를 당기니

철제 고분이

귀를 쏘는 쇳소리를 내며 열린다

벌겋게 삭아가는 서랍 속엔

만년필 한 자루

뚜껑을 연다‘딸깍’

펜 끝에 말라붙은 희미한 잉크 자국

안케스나문의 연꽃*인가

튜브를 눌러 갇혔던 숨을 쏟아낸다

오랜 잠에서 깬 미라에게

잉크병 검은 피를 수혈해 준다

오래 된 문자로

끊어졌던 시간 속 이야기들을 이어가야 하리라

 

2

‘인체의 신비’전시관에서

삶도 죽음도 정지된 미라를 본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생명들인가

살 속으로 포르말린 냄새가 베어든다

골키퍼 근육전시관* 앞에서 문득

만년필을 꺼낸다

메모를 하려해도 눌린 자국만 남을 뿐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

튜브를 꺼내 살짝 누르자

굳어가던 잉크 몇 방울‘툭 툭’떨어진다

미라가 된 한 생애도 이렇게 말라갔을 것이다

강인한 힘줄로 움켜잡은 저 손아귀 속엔

어느 축구장의 흥분이 쥐어있는지

허벅지 근육이 팽팽히 섰다

 

손바닥에 묻은 잉크 자국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안케스나문의 꽃: 투탄카멘의 어린 아내가 마지막으로 바쳤다는 꽃. 3300년 후 발굴 당시까지 빛깔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고 함.

*팔과 어깨의 근육을 보기 위해 전시한 미이라.

 

 


 

 

최종무 시인 / 애막골 약수터

 

 

소나무 숲에 약수터가 생겼다

물이 샘솟는 둘레를 파고

손잡이 깨진 옹기시루를 들어앉혔다

콘크리트 반죽으로 벽을 만들고

깨진 슬레이트 조각으로 지붕을 얹었다

시루에 물이 고이자

애막골에도 약수터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파트로 이사 온 날부터

그늘에 쭈그리고 나앉은 오래된 장독들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약수터로 모여들었다

등이 구부정한 독들이 물을 퍼 마시고

죄죄한 눈으로 차오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새벽하늘이 몸속에 내려 앉아 일렁이기를 기다렸다

 

태풍 지나간 늦여름 저물녘에

낯선 팻말이 약수터에 세워졌다

"이 물은 마시기에 부적합하므로 음용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애막골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전쟁 때 시체를 골짝 가득 묻었다는 이야기며

 

솔가지에 목을 맨 노숙자 부부를

이 골짝 어딘가에 묻었다는

흉한 소문들을 약수물에 내뱉으며

바가지들을 모조리 깨뜨렸다

 

그래도 꺼칠한 늙은 장독들은

날마다 약수터에 몰려와 물을 마셨다

물이 뱃속에서 천천히 약수로 변하는지

이빨 빠진 장독들이 입을 헤 벌리고

약수터 팻말의 글자를 긁어댔다

"이 물은 마시기에 ▒적합하므로 음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시인정신 2013년 여름호

 

 


 

 

최종무 시인 / 고산목高山木

 

 

1

대청봉에서 본 앉은뱅이 나무는

빙점 아래 무게 중심을 두었는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가지에선

마른 이파리와 붉은 열매 몇 개

바르르 떨고 있었다

 

2

여름 저녁 명동에서 그를 만날 줄이야

가지마다 수세미와 좀약 봉지들을 매달고

고무로 휘감은 아랫도리를 밀며

찬송가 속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그 앞에선 모두 웃음을 지우고

거리를 조금씩 내어주고 있었다

술 취한 일본여인이 던진 천 원짜리 한 장

그는 더 느린 찬송가를 불렀다

한여름에도 빙점 위에서 떨고 있는지

그림자 속에선 찬바람이 술렁거린다

대청봉에서 씹어 삼켰던 열매 두어 개

그의 마지막 혈점이었을까

 

더듬거리던 그림자 내 앞에서 멈칫,

야윈 손을 내민다

가는 뿌리가 내 혈관에 박힌 것일까

등줄기가 서늘하다

 

3

노란 가로등이 켜졌다

사람들이 표정을 꾸미는

거리엔 길차게 손질된 가로수들이

후텁지근한 허공을 휘젓고 있다

모든 것이 위로만 부풀어 오르는 도시

지독한 열대야다

 

 


 

 

최종무 시인 / 플라타너스 책방

 

 

전차부대가 떠난 연병장에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헌 책방을 열었다

고물상 트럭이 처리장에 들어오는 날이면

녹슨 캐비넷에 헌 책들이 채워진다

사진만 오려내고 버려진 잡지

일급비밀을 파헤쳤던 스릴물도 여기선

밟히고 구겨진 일상으로

낱장 몇 쪽 찢어진 채 무심히 읽힌다

 

책방 단골손님은 바람이다

가끔 고물상 김 기사가 탈색된 흔들의자에 파묻혀

하늘을 읽어내기도 하지만

바람이 냉큼 책장을 덮어버리면

잠 그늘 속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잠꼬대하는지

희뜩희뜩 책갈피가 펄럭일 때마다

가벼워진 활자들이 공중으로 훌훌 흩어진다

 

바람이 책방 문을 흔들면

플라타너스 책방에선 한여름에도

낙엽 타는 냄새가 풍겨 나온다

 

찢어진 특종들이 날아다니고

빛바랜 유혹들이 흙바닥에 굴러다니는

책방

좀 먼지로 풀썩이며 넘어가는

책갈피에 봉숭아 몇 잎 끼워

어느 크리스마스에 오늘 빛깔을

더듬어 볼라나

 

-시인정신 2014년 여름호

 

 


 

최종무 시인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제9회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오래된 집은 달밤에 알을 품는다>로 시부문 당선. 시집 『아부지』. 용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