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성선 시인 / 길 - 山詩 8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17. 13:06

이성선 시인 / 길 - 山詩 8

 

 

먼 산이 내려와 고요히 누운 연못 위로

개구리 한 마리 헤엄쳐

간다

 

세상을 물으려 찾아가고 있다

 

탁발승 하나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물 위에 달빛 붓으로 - 山詩 31

 

 

가랑잎 종이 위에다

평생 이름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슬픔이더냐

차라리 실컷

물 위에 달빛 붓으로 글을 쓰겠다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꽃 한 송이 - 山詩 35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로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로구나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고요하다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이성선 시인 / 큰 산 앞에 춤을 추다

 

그는 혼자 밖에 나가

큰 산 앞에 춤을 춘다

먼 곳에 희미하게 달 뜨는 시간이나

깜깜한 그믐

별이 뚝뚝 떨어지는 자정 넘어서

모두가 잠든 후면

혼자 마당에 나가

산 앞에 춤을 춘다.

님을 향해

그 분과 마주 춤을 춘다.

하루 한 번 눈물도 없이

가장 깊고

가장 고요한 시간 위에 덩실덩실

두 팔 들고

산과 마주 하여

 

 


 

 

이성선 시인 / 논두렁에 서서

갈아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왕하던 내가

저 세상에 건너가 서 있기나 한 듯

무심하고 아주 선명하다.

 

 


 

 

이성선 시인 / 나무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이성선 시인 / 달빛 발자국

- 山詩 45

 

 

달빛이

산길을 쓸자

냇물처럼

길이 산 위에 떴다

 

너구리 까투리 고라니 산밤 찾는 들쥐들

발가락에 달빛 묻어

 

어떤 발지국 줄은 산 위에서 별 쪽으로 사라지고

다른 줄은 마을로 내려오고

 

또 한 줄은

내 잠 속으로 숨어들어

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내 뼈골 속에 흩어져 달빛으로 찍힌

작은 하늘 흔적들

- 이성선 시집 <산시> 1999

 

 


 

 

이성선 시인 / 해 지는 소리

- 山詩 47

 

 

향기 있는 사랑이 그립다

해 지는 소리 남아 있는 산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잔다

산이 저무는 시간

물 속에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세상은 깊어지는데

사람들만 야단이다

 

꽃이 지면 허공은 새롭다

새 그림자 지나가면 물이 더 맑다

남으려 하는 것은 욕된 것

머물려 하는 것은 아직

너를 넘어서지 못한 것

삭발한 산을 따라

기다리는 이 없는 곳으로 떠돌리라

 

물 속 빈 산에서 들리는

당신의 독경소리 찾아

- 이성선 시집 <산시> 1999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2001 향년 60세)

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1969년 문학 동인 '설악문우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1970년 ≪문화비평≫에 작품<시인의 병풍>외 4편으로 등단. 1972년 ≪시문학≫에 추천을 받아 재등단. '갈뫼 및 물소리' 동인으로 활동.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석사. 1988년 강원도문화상.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에 겸임교수. 시집 ≪시인의 병풍≫ 외 개인 시집 14권, 공동 시집 4권.